문화일반

[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매스게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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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 1980년 춘천종합운동장에서 진행된 전국소년체전 개막리허설에서 학생들이 매스게임과 카드섹션을 선보이고 있다. 강원일보 DB

‘매스게임(mass game)’을 아시는지. 일명 ‘집단체조’라고도 부르는 이 게임에 우리는 참 많이도 참여했었다.

말이 좋아 ‘참여’라고 하지, 수업 시간 중간 중간 짬을 내 영문도 모르고 이리 저리 끌려 다녀야 했으니, 한참 당했던(?) 이들에게는 글쎄…,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새마을 운동이나 미니스커트, 장발단속처럼 딱히 구체적인 설명없이 관(官)이 정하면 뭐든 해야했던 그 시절, 또다른 동원의 기억들이다. 지금이야 북한 관련 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국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이지만 그땐 우리 주변에서도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던 일이었다. 매스게임을 전담하는 교사가 있었고 이들을 해외로 수출할 정도였다.

사진2 : 쫄쫄이 같은 옷을 입고 동작을 해야 했던 여학생들은 대부분 이 난감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기 일쑤였다. 강원일보 DB

일단 매스게임을 하기 위한 조건이 있었다. 한 도시에 적어도 ‘전국체전’ , ‘전국소년체전’ 같은 큰 이벤트 개최가 결정되면 그 곳에 사는 중·고등학생은 영락없이 몇달 동안은 이 알 수 없는 퍼포먼스에 시달려야 했다. 때로는 초등학생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생각 해보라. 동원된 수 천명의 학생들이 일사분란한 모습을 보여야 전체적인 그림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니, 그 연습의 강도가 얼마나 셌을지. 그러니 그 시절 학생들은 공부하랴, 매스게임하랴 참으로 고단한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보면 각 학교에서 진행하던 개별 연습의 성과를 한자리에서 점검하는 날이 돌아오게 된다. 관객석에 앉아 형형색색의 종이나 천을 지시에 따라 들어 올렸다, 내려 놓았다를 반복하는 카드섹션(card section)에 참여하면 그나마 나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선생님의 추상같은 지적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그래서 작렬하는 태양 빛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얼굴 전체로 받아들이며 때아닌 선탠을 해야했다. 그런가하면 다리를 훤히 드러낸, 내의 수준의 쫄쫄이를 입고 운동장 한가운데서 각종 동작들을 소화해야 했던 학생들은 몰려드는 창피함에 홍당무가 된 얼굴을 들지도 내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해야 했다. 지도 선생님의 손동작은 봐야겠고, 그러자니 남여 학생들의 눈빛 교환이 강제로 이뤄지니 난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대열의 가장 앞, 또는 가장 뒤 등 가장자리에서 동작들을 해야 했던 여학생들은 카드섹션을 위해 객석에 앉아있던 짖궂은 남학생들의 놀림감이 되곤했다.

사진 3 : 필요하다면 이런 류(?)의 동원에 초등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원일보 DB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1970~80년대 행해진 대규모 체육행사에서 매스게임은 없어서는 안될 프로그램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84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보면, 매스게임이 어떤 규모로 어떤 분위기로 진행됐는지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아무튼 매스게임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으니, 그 완성도 또한 해를 거듭할 수록 높아졌다. 급기야 1975년에는 아프리카에 우리의 매스게임이 수출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당시를 신문기사를 보자. “민족제전인 전국체전의 하일라이트 개회식을 해마다 화려하게 수놓은 매스게임이 아프리카까지 수출되게 되었다. (중략) 이들 3명은 3개월간 리베리아에 머물면서 내년 1월4일 리베리아 대통령취임식 전의 공개 행사로 아프리카에서 첫 선을 보일 여러종류의 매스게임을 지도할 계획이다.(1975년 11월4일자 경향신문 6면 보도)” 이것도 문화컨텐츠 수출일까 싶지만 자부심 만은 엄청났던 것 같다. 심지어 전국체전 개막식에 비가 내렸는데도 차질없이 진행된 매스게임을 두고 찬사를 보내는 기사가 버젓이 지면을 장식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시절이었다.

사진 4 : 고적대(鼓笛隊)가 있는 학교에서는 행사를 위해 여지없이 학생들을 보내야 했다. 강원일보 DB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매스게임 연습 때문에 아이들이 공부할 시간을 뺏긴다면서 경상북도의 어느 명문여고 어머니회가 들고 일어나 교육위원회와 체육회에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이를 치맛바람이라고 폄훼하면서 체전의 꽃이라고 불리는 매스게임을 맡은 영예를 사양하는 것이 고작 공부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냐는 비아냥이 넘실댄 것. 오히려 학생들의 단결심과 애교심이 늘었다는 정체불명의 성과를 들이대며 한 힐난(1975년 4월3일 조선일보 17면 보도)이 아주 당연한 반응처럼 나왔으니 이게 과연 정상적이었을까 헷갈릴 정도다. 그로부터 몇년의 시간이 흘러 1981년. 국회에서 1988년도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각 부처의 현황보고를 듣는 자리에서 당시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한 발언이 인상적이다. 이 장관은“올림픽대회가 체육경쟁만이 아닌 전야제, 매스게임, 음악 등이 종합된 대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 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 멘트가 남북 단일팀 구성제의에 관한 것이었으니, 얼마나 매스게임에 진심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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