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정치는 4월 총선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정당별 경선 과정에서의 갈등과 분열은 익히 겪어왔지만 지금의 상황은 정치혐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정치 양극화를 넘어서 극단의 대립이 정당 내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이들은 흔히 ‘국민’을 명분으로 삼으며 ‘국민’을 위해 각자의 진영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변하나, 선뜻 설득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이 강조하는 국민은 누구인가?
이러한 한국 민주주의를 진단하는데 있어 포퓰리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유용하다. 흔히 국내에서는 대중영합주의 정도로 해석되며 부정확하게 사용되어왔고, 정치권에서는 자기 진영의 존재와 정책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상대 진영을 ‘포퓰리즘’이라 비판하곤 했다. 포퓰리즘이 분명 부정적인 정치이념이자 전략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듯 하나, 정확한 그 의미를 이해한다면 포퓰리즘의 확대가 한국의 민주주의, 특히 정당의 대의기능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포퓰리즘은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포퓰리스트는 대중을 ‘순수한 국민’과 ‘부패한 엘리트’라는 적대적 두 집단으로 가르며, ‘순수한 국민’이 ‘타락한 기득권 엘리트’의 우위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때의 ‘국민’이란 한 국가 내부의 모든 국민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현안에 대해 관심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의미가 크다. 상당히 배타적인 정치전략으로서의 포퓰리즘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문제를 양산하며, 대표적인 예가 지난 미국 트럼프 행정부 당시 미국이 이민자들에게 보였던 배타적인 태도였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자,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확대하며 트럼프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를 외칠 때, 이민자들이 설 곳은 없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부정직한 힐러리(crooked Hilary)’라고 2016년 대선 캠페인 당시 비판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 놓여있다. 퍼스트레이디, 뉴욕주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거친 대표적인 주류 정치인 힐러리를 ‘부패한 엘리트’로 인식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포퓰리스트들은 위기 상황을 강조하며 ‘순수한 국민’과 ‘부패한 엘리트’ 간의 적대적 균열선을 선명하게 하려 한다. 포퓰리즘은 사실 정치적 이념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그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등장한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는 반엘리트주의와 반이민주의 맥락 속에서 등장했고, 현재 한국의 정당들은 경제, 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소수의 ‘국민’들에게 배타적 정당성과 대표성을 부여하고자 경쟁하고 있다. 동시에 갈등 상황을 활용하며 포퓰리즘도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당은 대의민주주의가 강조하는 다원주의와 포용성, 소수의 권리보호,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따르며 대의기능을 수행하기보다 여론조사, 국민투표와 같이 소위 ‘국민’의 의지가 직접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선호하게 된다. 정당 스스로 대의기능을 포기한 채 극단화된 ‘국민’ 집단만을 대변하고 선동하며 선거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삼게 되는 것이다.
물론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제도가 등장한 이래로 병존해왔으며, 민주주의의 병리적 현상이다. 분명 포퓰리즘이 쉬운 길일 수 있으나, 그것이 어렵게 이뤄온 한국의 대의민주주의와 정당정치를 무너뜨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