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조선 왕실의 숲을 가다]비운의 소년 군주 애달픔 빼곡히 솟은 솔숲 사이 잠들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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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의 세 가지 금표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의 소나무 숲. 850여그루의 소나무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5월16일, 원창고개에서 바라본 화악산 정상엔 흰 눈이 쌓였다. 설악산을 비롯한 강원의 주요산들이 폭설이 내린 날이다. 찬기 품은 바람을 가르며 영월로 내달렸다. 오늘날의 영월을 만든 사람은 꼽으라고 하면 첫 번째로 숙종을 선택한다. 숙종은 장희빈과의 이야기가 사극에 자주 등장하면서 치마폭에서 재임 기간을 보냈을 것 같지만 조선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웠다. 큰 업적은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을 펼쳐 왕권을 강화한 임금이다. 일개 왕자 노산군(魯山君)으로 격하되었던 단종과 그 비를 왕과 왕비로 복권 시켰다.

그 외 대동법의 범위를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했으며 화폐인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시켜 상공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임금이다.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일컫는 영조와 정조로 이어지는 풍요의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영월은 다양한 목적의 禁票(금표)를 소유한 도시다.

첫 번째 금표는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에 있다. 국가명승 제50호로 지정된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로 삼면이 강물로 둘러쌓여 있고 한 면은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어 외부로 나가는 길은 강을 건너야 길 밖에 없는 곳이다. 유배지로 향하는 입구에 시 한수가 적은 비가 서 있다.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사간이 사전에 발각되어 영월에 유배중인 단종에게 내려질 사약을 전달한 의금부도사 王邦衍(왕방연)이 1457년 10월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진어하고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시다.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와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청령포금표

왕명으로 사약을 전달한 의금부도사의 마음을 엿보는 시로 가슴 먹먹하게 만든다. 청령포가 이름처럼 맑고 눈부시며 푸르다. 유유히 흐르는 동강과 빼곡히 서 있는 소나무와 하늘이 모두 맑아 내 마음도 청아해 지는 기분이다. 무료입장이라는 푯말을 보고 선착장으로 다가가 배에 오르자 마자 배는 1초의 기다림도 없이 유배지로 안내한다.

솔숲 입구에 안내판이 발길을 잡는다. 산림청과 생명의 숲에서 주관한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한 내력을 적고 있다. 매년 40만명이 찾아오는 청령포엔 소나무 850여그루가 영월군의 관리를 받고 있다. 주민등록번호처럼 일련번호를 부여받은 나무들이 관람객들이 맞이한다. 1726년(영조2)때 설치된 淸泠浦禁標(청령포금표)는 소나무 숲 가장자리에 설치돼 있다. 어른 키 만한 크기로 뒷면엔 동서로 33척, 남북으로 490척. 진흙이 쌓여 지형이 변하더라도 변함없이 출입을 금한다고 적고 있다. 1척은 30.3cm로 동서 1km, 남북15km를 출입금지 구역으로 설정했다.

주천면 망산 입구에 있는 금표.

두 번째 금표는 태실을 출입을 제한하는 금표다. 철종대왕 왕세자 태실(哲宗大王王世子胎室)의 출입을 금한 금표로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산356 망산 입구에 있다. 조선 25대 왕 철종과 철인왕후 사이에 출생한 원자 이융준(李隆準,1858.10.17 ~1859. 4.23)의 태를 묻은 태실이다. 그러나 태실은 이곳에 없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의 명당에 철심을 박아 맥을 끊기위해 태실을 한 자리에 옮겨 놓는 만행을 저지른다. 지난 1929년 조선총독부가 태실서 태항아리, 태지석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겼다. 지금은 뚜껑돌 만이 남아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망산 빙허루에 오르기 위해 계단 시작되는 지점 왼쪽에 금표가 있다. 높이 77㎝, 너비 45㎝, 두께 13㎝ 앞면에 ‘금표(禁標)’ 뒷면 철종 10년(1859년 2월 )건립했다는 글자가 흰돌에 박혀 있다

영월 무릉도원면 두산2리 황장금표.

세 번째 금표는 두산2리 황장금표다. . 금표의 위치는 두산2리 마을회관을 찾아가야 한다. 차를 세우고 회관 앞 100m 지점에 다리를 간너면 오른쪽에 서 있다. 두산리 황장금표는 우수한 산림자원이 분포한 지역임을 알려주는 임업관련 역사유물로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95cm크기의 자연석에 세워진 금표는 “黃腸禁標碑(황장금표비”의 5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마지막 글자인 碑(비)자가 빠진 4글자만 보인다.

표지석이 세워진 지역명은 황장골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표지석이 마을 이름에 영향을 준 듯 하다. 도내 금표 중 유일하게 초서체로 씌여 있어 가치가 높다. 세로로 음각돼 있으며 글자 크기는 대략 가로 15cm, 세로 20cm 정도다. 표지석 주변 도로를 포장하면서 사용한 아스콘이 금표 마지막 글씨 일부를 덮었다. 산림문화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좌표로 생각하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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