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블랙 스완’과 ‘회색 코뿔소’ 사건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8일 중국 공산당 20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 결정문의 배경을 설명하며 한 말이다. 물론 독재 체제로 회귀해 반(反)시장 정책을 거듭하면서 세계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중국의 시진핑이 이같은 위기론을 언급한 점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을 새삼 주목하는 것은 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블랙 스완 또는 회색 코뿔소 같은 위기에 노출돼 있다는 점 때문이다.
‘블랙 스완’은 말 그대로 검은 백조다. 1697년 영국 자연학자인 존 라삼이 호주의 강에서 처음 발견했다. 서구사회에서는 그 전까지만 해도 백조는 무조건 흰색이라고 생각했다. 인류에게 발견된 백조가 모두 흰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블랙 스완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흑조가 발견되면서 이런 생각은 무너지고 의미도 달라졌다.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인식된 상황이 실제 발생하는 것’이란 뜻으로 쓰인다. 실제 2001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상 최악의 9·11테러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블랙 스완의 대표적 사례로 인용된다. 큰 위기를 초래했던 사례에서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의존한 판단이 행동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상상할 수 없는 상황 올 수도
2017년부터 중국의 경제 상황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회색 코뿔소'였다. 회색 코뿔소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위험을 뜻한다. 코뿔소는 몸집이 커서 멀리 있어도 눈에 잘 띄고 진동만으로도 움직임을 느낄 수 있지만 코뿔소가 달려오면 두렵거나 대처 방법을 알지 못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회색 코뿔소는 미국 위기관리 전문가인 미셸 부커 세계정책연구소장이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소개한 개념이다. 발생 가능성과 파급력이 큰데도 간과하는 위험을 뜻한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르바오도가 2017년 “경제에서 회색 코뿔소도 경계해야 한다”는 칼럼을 실은 건 시진핑이 국가부채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직후였다. 이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8년 신년사를 발표한 베이징 중난하이 집무실에서 ‘회색 코뿔소가 온다(The Gray Rhino)’라는 책이 카메라에 잡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최근 ‘블랙 스완’ 또는 ‘회색 코뿔소’ 같은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세계 각 국이 글로벌 경제·기술 패권 전쟁을 치열하게 벌이며 그 어느 때보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 강국 미국과 신흥 강국 중국 간의 패권 경쟁이 국제 질서 재편을 가속화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뿐 아니라 미국도 국력을 다시 일으키고 자국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나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모두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이유는 미국인의 최대 관심이 ‘어느 후보가 미국을 더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느냐’에 맞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되든 앞으로 우리나라의 부담은 커질 게 분명하다.
변화에 눈감고 있어 걱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올해 2분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6개 분기, 1년 반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내수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수출은 전체 경제 성장세를 끌기는 역부족이었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속보치’에 따르면 올해 2분기 GDP는 전기대비 0.2% 감소했다. 우리 경제가 전기비 역성장한 것은 2022년 4분기 이후 처음이다. 경기 침체와 함께 닥쳐오고 있는 막대한 부채, 불투명한 금융, 자본 유출, 부동산 거품 등 역시 위험 요소다. 단기적으로 일자리, 중장기적으로 저출산 문제 역시 위협을 주고 있다. 많은 기업은 최저임금 인상, 내수시장 침체 등 시한폭탄 앞에서 존폐 자체를 걱정하는 중이다.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미증유의 블랙 스완이나 회색 코뿔소를 겪을 수 있는 때다. 그렇지 않아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여야가 본연의 책무를 내팽개치고 연일 당 안팎에서 진흙탕 싸움만 벌이고 있는 탓이다. 정치권이 바깥 세상 변화에는 눈을 감은 채 위기 불감증에 빠져 권력 투쟁에만 열을 올리고 있으니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