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등에 지고 짐을 옮기는 전통적인 운반 기구인 ‘지게’. 보통은 쌀포대나 나무짐을 실어 나르거나, 옹기장수가 여러개의 옹기 항아리를 얼기설기 엮어 옮기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곤 했다. 1937년 여성지 발표된 김유정의 소설 ‘땡볕’에서는 남편 덕순이 죽음이 예고된 아픈 아내를 지게에 실어 짊어지고 병원을 오가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지게는 우리의 일상에서 꽤나 익숙한 기구였다. 기록에 따르면 삼한시대부터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오랜 역사만큼이나 유서깊은 물건인 것 만큼은 틀림없다. 지금이야 시골에서도 지게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됐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도시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지게를 이용해 짐을 나르는 ‘지게꾼’이라는 직업군이 등장하면서 부터다. 나무로 쉽게 만들 수 있는데다 특별한 배움이 없어도 요령만 있으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무거운 짐을 거뜬히 옮길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니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올라 온 이들이 바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진입 장벽이 가장 낮은 직업이 바로 지게꾼이 되는 것이었다.
1967년 10월에 한 신문에 실린 ‘이농 상경자 격증 풍찬노숙(동아일보 10월12일)’ 기사에 따르면 가뭄으로 고향을 떠나 상경한 이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서울역 주변에 있던 지게꾼 수가 한꺼번에 500명이나 늘어났다고 한다. 서울에서의 경쟁에서 밀려난 지게꾼들은 다시 서울 주변 도시로 떠밀려나가기 일쑤였다. 지게꾼들은 주로 역이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기차와 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짐든 손님을 대상으로 호객을 해야 했다. 그것도 손님에게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의 숫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곧바로 일이 잡히는 것도 아니었다. 큰 짐이 있는 손님을 보고 득달같이 달려온 다른 지게꾼과의 품삯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겨우 일거리 하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짐의 무게와 옮기는 거리에 따라 지게꾼의 품삯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넘쳐나는 지게꾼 속에 급할 것 없는 손님의 배짱이 만나면서 하릴없이 ‘품삯인하’를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수입으로 이어지면 다행이었다. 지게꾼들에게는 짐이 많은 손님을 가려내는 눈썰미에 앞서는 운(運)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기껏 달려간 손님에게 짐을 받으러 나오는 이들이 있다거나 끝내 직접 들고가기를 고집한다면 수입은 고스란히 날아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비라도 내리면 그날은 그대로 공치는 날이었다. 그래서 역이나 터미널에서 손님 만나는 것을 운에 맡겨야 하는 불확실성 보다는 시장에서 정기적으로 짐을 옮기는 일을 잡는 것이 모든 지게꾼들이 바라는 소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짐을 나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게 청소나 잔 심부름 등은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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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지게꾼의 위치는 급전직하, 위기를 맞게된다. 누군가는 그 시작을 손수레(리어카)나 자전거, 국민 배달 오토바이로 불리는 시티(CITI) 100의 등장으로 분석하기도 하지만 이전부터 존재하던 일종의 카르텔이 운반과 관련된 일을 독점하면서 경쟁에서 밀려난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1960년대 김장시즌을 맞아 배추나 양념 등을 각 가정에 배달하는 일은 지게꾼들에게는 큰 수입이 되는 것이었지만 시장 내에 결성된 조합 등에서 이권에 개입하고 담합을 하면서 일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시장 주변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고는 조합원들에게 일을 주며 자신들이 정한 가격으로 폭리를 취하는 행태가 벌어지면서 가뜩이나 백없고 돈없는 지게꾼들은 더 멀리 밀려나게 된다. 그나마 골목이 좁거나 경사가 심해서 자전거나 손수레, 오토바이가 드나들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수요가 있었지만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렵던 시절, 없이 살던 이들의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고, 험한 길을 마다않고 자재를 옮기는 등 힘든 일을 마다 않던 그들은 산업화가 가능할 수 있도록 빈 여백들을 채운 숨은 일꾼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