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달이다.
이제 며칠 지나면 달력은 한 장밖에 남지 않는다. 12월이 되면 마음이 바쁘다. 한 해가 또 이렇게 가는구나, 올해 뭐 제대로 한 일도 없는데, 그런 마음으로 심란하다. 한편으론, 그래도 아직 한 달이 남았구나, 하고 한숨 돌리기도 한다. 11월은 그래서 고마운 시간이다. 아직 연말의 소란함은 시작하기 전이고, 나는 올 한 해 어떻게 살아왔나, 꼭 마무리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돌아볼 시간을 허락받는다.
11월에 가장 고마운 것 중 하나는 황금빛으로 물드는 은행나무다.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의 샛노란 향연을 올해는 꼭 보러 가야지, 했는데 역시 못 가고 말았다. 들어가는 길목이 온통 주차장이라는 말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어디에든 은행나무가 없으랴. 기온이 뚝 떨어지고, 스산한 늦가을 바람이 가슴 한 켠을 휘익, 통과해 지나가는 11월, 노랗게 빛나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문득 눈부시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햇살을 받아 찬란하고, 바람이라도 몰아치면 후드득 떨어져서 길바닥까지 황금빛으로 뒤덮는다. 괜시리 조급했던 마음이 위로받는 순간이다.
은행잎이 지나간 11월은 갈색과 회색의 시간이다. 잎이 져버린 나무들은 앙상하게 마른 가지를 드러내고, 추수가 끝난 들판은 헛헛하게 비어있다. 대지의 여신이 저승의 왕에게 딸을 돌려보내야 하는 시간이라서 일까. 하지만 11월은 메마른 갈색 아래 초록을 품고 있는 생명의 시간이다.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는 11월을 ‘진정한 봄’이라고 불렀다. “지금 행해지지 않는 것은 4월이 되어서도 행해지지 않는다. 미래는 우리 내부에 있다.” 카렐 차페크는 1년 열두달의 정원 일을 담은 책 <초록 숲, 정원에서 온 편지>에서 11월의 스산한 풍경을 두고 “자연은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떠밀며 나아가고 있다. 자연은 단지 가게 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을 뿐”이라고 썼다.
11월이 4월을 품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농사를 짓거나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낙엽은 쓸어 내버려야 할 쓰레기가 아니다. 혹독한 겨울 추위로부터 나무뿌리를 보호하는 포근한 이부자리다. 11월은 내년에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나무들의 가지를 쳐주고, 구근을 갈무리하는 시간이다. 봄에 심는 꽃인 백합, 아이리스, 달리아, 칸나는 구근을 캐서 그늘에 말린 뒤 내년 봄을 기다리며 냉장보관한다. 강릉시 연곡의 한 식당 여주인은 해마다 11월이면 여름 내 식당 뒤쪽 언덕 가득 피었던 칸나를 캐서 지인들에게 구근을 나눠주는 기쁨을 자랑한다. 수선화나 크로커스, 튤립 같이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은 11월에 미리 심어놓아야 내년 이른 봄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오는 강인한 새싹을 볼 수 있다.
11월은 서리가 내리고 겨울에 들어서는 시기이지만, 한 해의 끝이 아니라 새해를 준비하는 시기이다. 꽃피고 열매 맺는 내년의 시간을 준비하는 11월의 행사로 지난주 있었던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년 3월 크로커스 새싹이 뾰족하니 올라오고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꽃눈이 맺히는 시간, 청년들도 자신의 삶을 꽃피워 나갈 자리에 있게 될 것이다. 떨굴 것은 다 떨구고, 내버릴 것은 다 내버려야 내년 봄 힘차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 농업인의 날이 모내기로 바쁜 초여름에서 11월 11일로 바뀐 것도 그런 뜻 아닐까? “새싹은 땅 밑에서 미래를 준비 한다...(중략)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은 성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카렐 차페크의 말에 100% 공감하는 11월의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