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9년 12월20일 경성지법 형사부 재판정에서 ‘피고인’ 남궁태는 판사를 향해 외쳤다. “여기가 어디요. 대일본제국? 여기는 조선이다. 대일본 제국은 바다 건너에 있다. 내가 왜 일본 사람들에게 재판을 받아야 하느냐.” 그는 일본의 속국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재판 자체를 거부하며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의자를 내던졌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지 거의 2년 만에 열린 춘천고 항일 비밀 결사조직 ‘상록회’ 재판에서 남궁태(광복 후 강원일보 초대 편집국장) 등 10명은 각각 징역 2년 6월을, 2명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록회 회원들의 항일 기개를 알 수 있는 것은 졸업 기념 사진에 새겨 넣은 글귀다. ‘우리의 우정은 봉의성(鳳儀城)처럼 늘 푸르르다’. 봉의산이 아니라 봉의성이라고 표현했다. 고려 시대 몽고군에 맞서 봉의산성에서 결사 항전했던 춘천시민들의 용기로 일제에 항거하겠다는 의지였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최근 춘천 시청에서 춘천고등보통학교 상록회와 춘천농업학교의 독서회를 기리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국가보훈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지금껏 선정된 도내 학생은 춘천고보 41명을 비롯해 춘천농업학교와 강릉농업학교(강릉중앙고)는 합쳐서 20명 안팎, 그밖에 서울 등 다른 학교에서 활동한 강원도 출신은 17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40명이 넘는 학생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춘천고는 전국 유수의 항일 명문고다.
그런데 춘천고보의 항일운동 역사는 춘천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잘못된 정보 전달도 큰 역할을 했다. 강원도교육청과 광복회 강원지부는 20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춘천고 교내에 안내판을 세웠다. ‘1920년부터 1930년대까지 세 차례 동맹휴학을 전개하고 상록회 활동으로 인해 30명의 학생이 징계를 받았습니다’라고 두루뭉수리로 기록했다.
그러나 사실과 다르다.
일제 경찰조차 1939년 보고서에서 ‘춘천고는 배일 맹휴가 5회에 달하고, 학생들은 축제일 참석을 기피하고 배일 관념을 취하는 등 조국 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을 청년학도들의 책무라고 자랑삼는다’고 기록했다. 춘천고의 실제 항일 학생운동 역사는 5차례 동맹휴교와 한차례 백지답안 동맹, 그리고 상록회·독서회라는 두차례 비밀 결사조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퇴학당한 학생만 80여명에 달한다.
그런데도 동맹휴학을 3차례로 축소한 안내문이 버젓이 정확한 사실인양 후세들을 가르치고 있다. 반면 춘천농업학교에 세운 안내판에는 ‘9차례 동맹휴교를 했다’고 기록했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우리는 항일 학생운동의 정확한 역사와 함께 그들의 희생도 기억해야 한다.
춘천고 독서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영근은 평생 겨울 내복의 쫄쫄이를 가위로 잘라내 헐겁게 입고 지냈다. 일제 고문의 압박감에 가위눌리고 온 몸이 쪼여드는 악몽을 꾸기 때문이라고 했다. 춘천농고 독서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고광돈은 일제 춘천경찰서에서 고문받은 기억을 기록했다. “일본인 형사들은 매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잠을 재우지 않고 취조했다. 다리 종아리에 고름이 잡혀 썩어 갔다. 주전자 물에 고춧가루를 타서 목에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광복의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일제의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그의 진술처럼 ‘살썩는 냄새가 진동하던 감방’이 아니라 ‘평화와 행복이 흐르는 내 나라’에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