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월요칼럼]빠른 평화는 없다 : 미·러 외교의 시간 정치학  

정구연 강원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시간이 결국 자신의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하는 듯 하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우크라이나가 나토와 유럽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가 점령한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언뜻 보면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낙관하는 듯 보이지만, 미국의 직접 개입보다 유럽의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로 읽힌다. 이는 이미 전쟁 피로감이 누적된 미국 내 여론과 동맹국에 대한 비용 분담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미국은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는 신호일 수 있다.

반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경우 시간 벌기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8월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과 스티브 위트코프 특사의 방문에 푸틴은 휴전 가능성을 열어두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동시에 신전략무기감축조약(START) 연장 제안을 꺼냈다. 전쟁 종결과 핵군축을 한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미국의 외교적 시선을 분산시키고, 국제사회에 러시아는 ‘책임있는 강대국’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하려는 계산이 숨어있다. 전쟁에서는 양보하지 않으며 외교 의제에서는 협력적 제스처를 보임으로써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연계 협상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상대가 양보하지 않으면 다른 의제를 끌어들여 협상을 어렵게 만들고,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냉전기에도 소련은 군축협상을 아프가니스탄 문제나 북대서양조약기구 확장 문제와 연계시켜 시간을 벌곤 했다. 오늘날 푸틴의 협상 행태는 이 오래된 전술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위와 같은 트럼프의 메시지는 미국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미국이 적극적인 중재자에서 한발 물러서고, 유럽 동맹국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우려 한다면 협상 테이블에서의 대러 레버리지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오히려 푸틴은 장기전을 감수하면서 외교적 레버리지를 확보하고, 전쟁 상황을 기정사실화하려한다. 최근 러시아의 무인기는 수 차례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 영공을 침범했는데, 이는 회색지대 전술이자 미국의 시선을 우크라이나에서 돌리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결국 피해는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돌아가고, 전쟁 종결은 더 멀어지는 셈이다.

이러한 미러 외교의 상황은 한국에게도 중요한 함의를 준다. 첫째, 강대국 간 갈등이 장기화될 경우, 중견국의 외교 공간은 축소된다. 둘째, 군축협상이 휴전 협상과 연계되는 양상은 한반도 정세에도 함의를 줄 수 있다. 북한 문제 역시 군사·핵 의제와 평화체제 구축 의제가 연계되어있다. 셋째, 미국의 직접개입 축소 및 동맹국 부담 증대가 한반도에도 적용될 경우, 한국 역시 더 큰 전략적 책임을 감당해야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호언장담했던 빠른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는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앞당기기 보다 지연시킬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최근 러시아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위한 군수물자 지원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를 통해 북중러 연대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안보와 아시아의 안보가 연계되는 상황이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러시아가 시도하는 시간벌기는 결국 인도태평양 안보 지형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이렇게 지금의 국제관계는 한국의 운신의 폭을 이미 좁히고 있다. 이를 상쇄하기 위한 더욱 적극적인 대외정책, 지정학적 사고와 국제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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