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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시절인연(時節因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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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남원 기자

교실에서 가장 먼저 전해지는 건 책 속 지식이 아닌 스승의 눈빛이다. 그 눈빛 속에 담긴 따뜻함과 존중, 혹은 무심함은 교육에 대한 첫인상이 된다. 아이들은 교과서의 문장을 읽기 전에 스승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먼저 배운다. 지식은 머리에 쌓이지만 눈빛은 마음에 새겨진다. ▼스승은 제자를 문 앞까지 데려다줄 수 있지만 문을 열고 나가 어떤 길이 옳은지는 일러주지 않는다. 그 길 위에는 가르침은 물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연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의 편지 왕래는 단순한 문답을 넘어 인격적 교류의 정수였다. 편지글 속엔 논리보다 배려가 있었고, 학문보다 정이 녹아 있었다. 정답만을 좇는 오늘날의 교육 속에서 그런 시절인연(한 시기와 인연 속에서 맺어지는 관계)은 더없이 귀해졌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축소되는 현실 속에서 교육은 점점 메마른 기술로 전락하고 있다. ▼최근 교실에서 ‘관계’가 사라지고 있다. 교사는 강의자, 학생은 수강자라는 인식이 굳어지면서 교육은 점점 서비스화되고 있다. ‘좋은 점수’가 교육의 전부처럼 여겨지는 구조에선 인연도, 감동도 없다. 입시와 성적 사이에 낀 채 스쳐가는 관계들, 그 안에서 과연 교육이 어떻게 ‘사람’을 남길 수 있을까. 학기마다 바뀌는 강사, 클릭 한 번이면 사라지는 수업, 평가 위주의 커리큘럼은 모두 시절인연을 끊어내는 장치들이다. ▼좋은 교육은 시간과 사람이 만들어낸 결과다. 한 시절을 함께한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기억할 때, 그 만남은 단순한 학습을 넘어선다. 무엇을 배웠는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였는지가 교육의 본질을 말해준다. 시절인연이 없는 배움은 효율일 수는 있어도 감동이 될 수 없다. 시든 교실에도 다시 봄은 온다. 어떤 교사가 제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학생도 그 시절 함께한 장면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다면 교육은 여전히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관계를 잃지 않는 교육, 그것만이 시대를 넘는 배움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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