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발언대]농부(農夫)처럼 씨앗을 소중히 여겨야

정병걸 전 삼척국유림관리소장

정병걸 전 삼척국유림관리소장

우리 선조들은 ‘농부아사 침궐종자(農夫餓死 枕厥種子)’라 했다.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내년 농사를 지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뜻이다. 다산 정약용의 ‘이담속찬(耳談續纂)’에서 유래된 이 말은, 씨앗이 단순한 농자재를 넘어 농민에게는 생명과 같은 미래이자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근본임을 일깨워 준다.

필자는 산림청에서 40여년간 우리 산림을 푸르게 가꾸는데 평생을 바쳤다. 퇴직 후에는 직접 흙을 일구는 농림업인으로서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지난 해에는 산림복합경영의 일환으로 산림경영지와 인접한 농지에 아들과 함께 사과 과수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평생 나무를 다뤄온 임업인으로서 아들에게 나무를 고르고 기르는 방법부터 알려주려 했으나, 정작 현장에서 과수 묘목의 유통산업은 내가 알고 있는 현실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했다.

기후변화가 바꾼 재배 지도(地圖)와 현장의 고민은 체험으로 얻어진다. 우리나라 과수 재배는 고려시대 명종 18년(1188년) 왕이 배와 밤, 대추나무 재배를 권장했을 만큼 역사가 깊다. 전국적으로 지목상(공부상) 과수원은 약 60만㏊(약 40여종)로 추정된다. 사과 묘목을 심으며 가장 먼저 느낀 점은 ‘기후변화’로 인한 생육환경 문제였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연구에 따르면 2030년대면 내륙의 사과재배 적지가 대부분 사라지고, 2050년대에는 강원특별자치도 일부 산지에서만 재배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사과는 한 번 심으면 20년 이상 수확해야 하는 장기 작물이다. 지금 심는 사과나무가 아들 세대의 생업과도 무관치 않아 선택과 결정에 고민도 많았다. 특히 기후에 적합한 적지 선정과 ‘무병묘’ 보급이 단순한 정책 구호를 넘어 농민의 생존권 문제임을 현장에서 체험하며 깨달았다.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공정 거래, 농부의 꿈을 꺾는다. 가장 가슴 아픈 경험은 사과나무 유통 과정에서의 불합리함이었다. 대개 묘목은 심기 1년 전에 계약서를 쓰고 보증금을 지불한다. 그러나 최근 묘목 가격이 폭등하자, 인수 시점에 이르러 “묘목이 없으니 계약금만 돌려주겠다”라며 일방적으로 계약 파기를 통보하는 판매상들이 왕왕 나타나고 있다. 묘목 유통의 상거래 문란 행위 앞에서는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하물며 이제 막 꿈을 품고 귀산촌한 청년 농림업인들이 겪을 좌절감은 오죽하겠는가? 이는 단순한 상거래 문제를 넘어 국가 농림업의 뿌리를 흔드는 일이다. 불공정 거래를 일삼는 종묘사업자에 대해서는 등록 취소나 영업 정지 등 강력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시장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다시 씨앗의 마음으로 가꾸며 살고 싶다. 가족과 함께 과수원을 일구며 다시금 ‘씨앗’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굶주림 속에서도 씨앗을 베고 죽었던 선조들의 마음가짐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하고, 당장의 성과보다 미래 세대가 누릴 건강한 산촌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우량한 과수목의 안정적인 공급에도 제도적인 뒷받침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과수는 앞으로도 생산량, 수출량, 가공량 등이 꾸준히 증가할 전망으로, 해외의 수출에도 유망한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농·산촌은 고령화로 일손이 부족하고, 사람이 없어 소멸 위기에 놓여 있어 걱정도 따른다. 이제 씨앗의 맘으로 초보 귀산촌인이 되어 누구에게나 품질 좋은 과일을 키워서 청정 먹거리를 제공하며, 지역도 살리고 싶은 욕심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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