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더초점]의병출신 독립운동가 훈장이 아직 창고에?

한림대 객원교수 김동섭

1919년 3월23일 오전 강원도 화천군 화천면 신읍리. 천도교인 김창희는 집으로 찾아온 일제 헌병과 맞섰다. 화천읍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 탄로나 일제 헌병들이 새벽부터 그를 체포하러 온 것이었다. “화천군민들과 시위하기로 계약한 날이므로 너희들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 헌병 보조원에게는“너도 조선인의 정신이 있다면 우리의 행동에 가입하라”며 꾸짖고, 동네 주민10여명과 함께 일제 헌병들을 내쫓았다.

김창희는 동네 주민들과 대형 태극기와 깃발을 들고 화천읍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조선독립국 만세’ ‘화천면민 대표 김창희, 이은규, 김성모’라고 쓴 깃발이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화천면민 대표’라며 굳이 3명의 이름을 쓴 깃발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시위에 대한 모든 책임은 우리 3명이 지겠으니 모두 따라오라는 얘기였다. 천도교 화천교구장을 지낸 그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준 것이었다. 더욱이 3명의 나이는 각각 64세, 51세, 32세였다. 노장청(老壯靑)이 모여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이었다.

산골 마을에 사는 60대 촌로가 ‘시위 계약론’를 내세우고, 젊은세대와 노년세대를 아우른 주민 대표’를 내세우며 60여명의 주민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나선 것은 놀라울 뿐이다.

화천의 3·1만세 시위는 다시 5일 뒤인 3월28일에는 상서면 주민들로 이어졌다. 종교적 색채도 없이 순수한 농민, 화전민들로 이뤄진 대규모 만세운동이었다. 서당 훈도, 산림 간수 등은 화전민들의 골짜기 집들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주민들을 모았다.

새벽에 동네 뒷산에서 봉화를 올려 출정식을 하고, 면사무소에서 면장과 면서기를 끌고 화천읍으로 향했다. 함경도 의병 출신으로 화천 화전민촌으로 숨어들어온 70세의 강명하와 그의 사위 김광필 등이 앞장섰다. 김광필의 부인 강씨는 결혼할 때 가져온 옥양목으로 태극기 수백 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화천읍까지는 먼 길이어서 망태기에 점심 도시락까지 싸서 손에는 곡괭이, 곤봉, 낫 등을 들고 모였다. 순식간에 모여든 군중이 2000명이라고 일제가 기록했을 정도로 거대한 물결이었다.

이같은 화천의 연이은 만세 시위로 167명이 체포되어 강원도내에서 가장 많았다.

안타깝게도 만세 시위를 주도해 옥고를 치른 이들이 그동안 무관심속에 방치되어 왔다. 특히 의병 출신 강명하는 100년만인 2019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아직 그의 훈장은 가족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강명하의 아들과 며느리, 손자는 625전쟁 중 공산 치하에서 반동으로 몰려 학살되었다. 두 손녀가 남았으나 전쟁으로 호적이 모두 불타 가족관계를 인정받을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강명하의 큰 손녀는 1974년 강원도지사로부터 할아버지 이름으로 된 공로패를 받았다. 1988년 발간된 화천군지에도 손녀가 고향에 살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도 보훈부는 강명하의 손녀라는 공적 기록이 없다며 후손 인정을 거부하고 있다.

이처럼 상서면 만세운동에서만 23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됐지만, 후손을 찾지 못한 이가 17명이나 된다. 강원도와 동네 주민들은 오래전에 후손이라고 인정해 주었지만, 법적 증거에만 연연한 보훈부는 손을 놓아버렸다. 의병 출신의 독립운동가의 후손에게 독립 영웅의 후손이라는 자부심마저 박탈한 이 나라는 아직 해방된 나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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