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도연의 창경바리]두 왕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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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임금인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를 방문했다는 전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건 아마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월정거리에서 털털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찾아간 골짜기 끝 상원사 입구, 친구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 옆에는 작은 비석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은 관대걸이라 불렀다. 피부병에 걸린 세조가 개울에서 목욕할 때 옷을 걸어두었던 장소라 했다. 등을 밀어주었다는 문수동자 이야기도 들었다. 상원사 문수전 계단 옆에 서 있는 돌 고양이 두 마리도 보았다. 세조를 시해하려는 자객이 숨어 있다는 걸 알려준 고양이들이었다.

초등학교와 월정거리 사이에는 만과봉이 있었다. 오대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평지와 만나는 곳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곳이 해가 잘 든다고 해서 양지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멋진 소나무와 교회, 그리고 민가들이 담을 맞대고 있었다. 그 끝자락 논 한가운데에 자리한 자그마한 동산은 마치 섬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통틀어 두 곳을 만과봉이라 칭했다. 옛날 그곳에서 과거시험이 열렸고 만 명의 응시자들이 고향마을의 흙 한 줌씩을 가져와 뿌렸다는데 그게 쌓여서 만과봉이 되었다는 것이다. 흙을 가져오라고 주문한 건 세조였다. 과거시험을 보는데 왜 흙을 가져오라고 했을까? 이해되진 않았는데 당시 오대산 아랫마을의 중학생이었으니 아마 그 모든 게 전설의 고향이려니 여겼을 것이다.

평창과 붙어 있는 영월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엄마들은 모이면 단종제가 볼만하다고 말을 모았고 아버지들은 교도소(구치소) 얘길 꺼냈다. 엄마들은 계를 해서 단체로 구경을 떠났고 아버지들은 윗마을의 누가 불법으로 도벌하다 걸려서 영월교도소에 갔다며 막걸리를 비웠다. 청령포로 귀양 와서 죽은 어린 임금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불쌍하다고 한숨지으며 엄마들은 밭고랑에 쪼그려 앉아 이랑에 감자를 심었다. 산림감수가 순경보다 더 독하다며 아버지들은 취해 비틀거렸다. 하지만 청령포나 장릉, 교도소는 너무 멀리 있어 어린 우리들은 찾아갈 수가 없었다.

청령포와 장릉을 드나들기 시작한 건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얼어붙은 서강 앞에서 건너편 소나무 숲을 바라보다가 돌아서기도 했고 장릉 입구의 술집에서 단종(노산군)과 삼촌 세조(수양대군)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취한 적도 있었다. 단종과 왕방연의 시를 새로 읽고 영월 관아의 자규루, 낙화암도 기웃거렸다. 엄흥도의 삶도 들여다보았다. 사육신과 생육신, 한명회를 공부했다.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단종의 비각도 찾아갔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어찌어찌 중편소설을 쓰긴 했는데 결과는 신통찮았고 곧 잊어버렸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러 ‘왕과 사는 남자’란 영화를 보았다. 영월이라는 유배지에서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그 틀이었다.

단종은 1457년 6월에 영월로 유배와 그해 10월에 죽임을 당했다. 조카를 내쫓고 왕권을 차지한 삼촌은 9년 뒤 신하들을 이끌고 금강산을 둘러본 뒤 1466년 3월에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 입구에 도착했다. 단종의 귀양길은 배를 이용해 원주 흥원창에 도착한 뒤 치악재를 넘어 영월 주천을 지나는 노선이었다. 두 왕이 강원도를 방문해 지나치고 머문 곳곳에선 전설이 피어났다. 당연히 권력을 쥔 세조의 치적과 전설이 풍부했고 반면 단종의 전설은 보잘것없었다. 다시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두 왕의 강원도 방문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영월은 올해 단종문화제를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라고 한다. 세조가 머무르다 떠난 오대산엔 그가 입었던, 피고름이 밴 명주 적삼이 남아 있다. 세조는 궁궐로 돌아갔고 단종은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다. 오대산을 나오면서 세조는 영월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가서 술 한 잔 부어 주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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