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8년(숙종 24년)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 과정을 치밀하게 기록한 ‘단종정순왕후복위부묘도감의궤’는 그 자체로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관통해 온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241년 만에 되찾은 이름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9건이나 제작되었던 이 의궤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에 의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100년 넘게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폐지 창고에 ‘중국 도서’로 분류돼 방치되던 이 의궤는, 1975년 재불학자 고(故) 박병선 박사의 집념 어린 추적 끝에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1991년 한국 정부의 공식 반환 요청 이후 기나긴 외교적 줄다리기 끝에, 2011년 5월 마침내 145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귀환은 완전한 소유권 반환이 아닌 ‘5년 단위 갱신 대여’라는 반쪽짜리 귀환이었다.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7일(현지시간), 프랑스 상원이 식민지 시대 불법 취득 문화재 반환 절차를 간소화하는 기본법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것이다.
이로써 수백 년간 프랑스 공공 소장품을 지탱해 온 ‘국유재산 불가양성’ 원칙의 빗장이 풀리며, 무력 약탈이 명백한 외규장각 의궤의 ‘영구 귀환’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의궤가 겪은 수난만큼이나, 의궤의 주인공인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의 삶 또한 비극적이었다.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지만 불과 18세의 나이에 단종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후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64년을 홀로 견뎠다. 그는 매일 서울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단종이 유배된 영월 방향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한다.
1521년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시댁(해주 정씨) 묘역에 묻혔다. 일개 왕족인 노산군 부인의 무덤으로 조성되었던 이 묘역은, 1698년 단종 복위와 함께 왕릉으로 격상되며 ‘사릉(思陵)’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발랐다”는 구절에서 유래한, ‘그리워하는 능’이라는 뜻이다.
정순왕후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단종이 잠든 영월 장릉(莊陵)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가운데 유일하게 수도권 바깥에 위치해 있다. 1457년 단종의 주검을 지역 호장 엄흥도가 거둬 자신의 선산에 암장했던 곳이, 1698년 복위와 함께 왕릉으로 격상된 것이다.
살아서는 18세에 헤어져 64년을 홀로 그리워했고, 죽어서도 영월과 남양주로 멀리 떨어져 묻혀야 했던 두 사람. 이들의 비극적인 서사는 5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꽃’이라는 생명의 매개체를 통해 새롭게 이어지고 있다.
2026년 4월 11일, 국가유산청은 남양주 사릉 일대에서 자란 들꽃을 채취하여 영월 장릉으로 옮겨 심는 추념 행사를 개최했다. 사릉 정자에서 고유제를 올린 뒤, 채취한 들꽃을 장릉의 ‘정령송(1999년 사릉에서 장릉으로 옮겨 심은 소나무)’ 주변에 식재한 것이다. 국가유산청은 이를 계기로 매년 여름 장릉과 사릉의 사초(무덤 주위에 나는 풀) 씨앗을 교환하여 심는 행사를 정례화하기로 했다.
세조실록의 건조한 한 줄 기록에서 시작된 단종의 죽음은, 241년 뒤 숙종 대의 치밀한 의궤 기록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그리고 다시 300여 년이 흐른 후 그들의 이야기는 따뜻한 들꽃으로 피어나며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처럼 역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와 공명하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