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인 1587년, 그의 정치적 수제자였던 이귀(李貴)는 국왕 선조의 면전에서, 자신의 스승 이이(李珥)가 평생 힘을 다해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려 애썼으나 불행히도 성취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을 몹시 애석해한다고 토로하였다. 당대의 율곡 평가는 이처럼 뜻이 꺾인 실패한 개혁가에 대한 회한으로 가득하다. 그러면 정치가로서 율곡은 정말 실패했을까?
율곡의 시대는 조선 건국 후 200여 년 가까이 흐른 때로, 세조의 왕위 찬탈과 연산군의 폭정 그리고 이어진 4대 사화로 점철된 폐해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이를 직시한 율곡은 자기 시대를 ‘중쇠기(中衰期)’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혁신이 없으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 진단했다. 다행히 선조 대에 들어오자 훈구·외척 세력이 퇴출되고 신진 사림이 조정을 장악함으로써 혁신의 발판이 마련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런 여건에도 개혁이 좀처럼 진전되지 않자 율곡은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의 결과가 1574년에 선조에게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이다. 여기서 율곡은 정치는 ‘시의(時宜)’ 즉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실공(實功)’ 즉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일이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사람 중심’에서 ‘과제 중심’으로 정치의 중심을 옮겨야 한다는 과감한 요구였다. 어진 임금과 현명한 신하만 있으면 저절로 태평성대가 이루어진다는 기존 유학자들의 단순한 생각을 혁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의 개혁은 순조롭게 실행되었을까? 아니다.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 국왕이었던 선조의 우유부단함과 생각지도 않았던 동서 분당이라는 이중적 장애가 발목을 잡았다. 그러던 중 1583년 1월, 여진족 추장 니탕개가 3만 기병을 이끌고 함경도 국경을 침략한 사건이 상황을 급반전시켰다. 선조가 비로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율곡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율곡은 국정 중추인 대신의 권한 강화, 개국 초 행정구역의 현실적 개편, 소신 행정을 위한 감사 임기 연장, 뒷날 대동법의 단초가 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그리고 각종 국방정책 등, 하나같이 나라의 체질을 바꾸는 정책들을 제시하며 개혁에 팔을 걷어붙였다. 하지만 불과 1년 뒤인 1584년 1월, 예상치 못한 그 자신의 급서로 율곡의 개혁은 안타깝게 좌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내놓은 개혁 정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전쟁을 거치며 위기에 직면하자 국난 극복을 위한 대책으로 하나하나 채택됨으로써 조선이 이후 300년을 더 지탱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생전에는 실패했지만, 사후에는 성공한 정치가가 바로 율곡인 것이다.
율곡의 성공 요인은 ‘무엇을(시의)’, ‘어떻게(실공)’ 해야 할지 정확히 인식했다는 점이다. 반면 실패 요인은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를 적시에 결단하지 못한 점이다. 그는 동서 분당을 화해시키는 데에만 힘을 쏟음으로써 타이밍을 놓쳐 생전에 개혁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 운동이 한창이다. 입후보자들은 저마다 지역을 발전시킬 적임자라며 지지를 호소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영 논리나 빛 좋은 정책들의 나열이 아니라, 지역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요구(시의)를 정확히 진단하고 이에 대한 실질적 대안(실공)을 제시하는 일이다. 실패와 성공이 교차하는 율곡의 치열했던 삶이, 표심을 좇아 동분서주하는 오늘의 입후보자들에게 진정한 정치의 본령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