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 지긋하면서도 점잖은 단체 방문객 10여명이 옛 서귀포관광극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들 중 두 명이 무대에 올라가더니 짧지만 수준 있는 오페라 한 대목을 즉석에서 공연하는 게 아닌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로 인해 그곳의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다시 찾아가도록 자극을 받는다. 사람이 사람을 부르고, 그 결과는 살아있는 삶의 재미와 풍경으로 전환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기억의 힘 일터.
1960년대초 개관했던 서귀포관광극장은 1973년 화재 이후 지붕까지 내려앉은 채 방치됐다가 서귀포시가 임차해 공간재생을 한 곳이다. 지붕이 없는 상태를 그대로 두고 낡은 영사기도 예전 자리에서 무대를 향한다.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지역주민협의회가 다양한 공연, 전시, 마켓 등을 수용하는 개방 플랫폼으로 운영하고 있다.
문화관광체육부는 2014년부터 ‘예술로공간재창조사업’으로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을 했다. 광명 업싸이클아트센터, 부천B39, 부산 F1963 등 많은 폐산업시설들을 장소적 의미와 가치를 기반으로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최근에는 폐교 등으로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핵심은 유휴화 된 공간을 철거하지 않고 장소성과 삶의 기억, 기록들을 발굴하고 가치를 재창조해 지역문화 활성화와 재생의 마중물로 삼자는 데 있다. 그동안 새로운 시설들을 조성했지만 활성화되지 못하고 다시 유휴화 되는 현상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기본원칙은 단순한 원형 보존이 아니라, 장소성의 창조적 활용을 통해 과거를 지우지 않고 미래로 가는 공간재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원주아카데미극장의 창조적 보존 문제는 서귀포관광극장 사례에서 시사를 받을 수 있다. 과거의 기억과 기록을 지역자산화하고 그 자산을 활용해 새로운 미래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본다. 아카데미극장과 같은 공간은 그 자체만이 아니라 원도심 전체와 연결된 삶의 기억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원주는 과거의 아카데미극장을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 속으로 호출해 지역자산화 하고 있다. 2015년부터 보존을 위한 시민의견수렴과 모금 등을 통해 아카데미의 장소적 의미와 가치를 현재화해왔지 않은가. 문체부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이 추구하는 바이지만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실현할 수 없는 과정을 원주는 이미 보여주고 있다.
시민들에 의한 아카데미극장 보존운동과 민관협력 사례는 타 지역이 갖지 못한 원주만의 소중한 실천 경험이자 자산이기도 하다. 이 자산을 밑천으로 삼아 아카데미극장의 미래가치를 공론화하고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려줄 것인지를 결정할 때다.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검열로 편집된 필름들을 보고 싶어 하는 어린 토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토토, 이것은 분명 네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때가 되면 돌려주마.”
편집된 필름 조각들을 이어 붙인 알프레도의 선물은 시네마 파라디소와 함께 중년의 영화감독이 된 토토, 아니 살바토레에게 과거이자 미래가 된다. 아카데미극장이 원주의 청소년, 청년들에게 그런 선물이 될 수 있을까. 과거를 지운 도시에는 미래가 없다. 원주시와 시민들에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