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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과거사-동해안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납북귀환 50년 되는 날, 어부 30명 재판정에서 피맺힌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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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과거사-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2)
납북 이후 1972년 9월7일 귀환, 50년만인 지난 7일 재심 심문
30명의 피해자들 일일이 고문과 폭행, 간첩조작 누명

◇납북됐다가 돌아온 지 정확히 50년만인 지난 9월7일 재심을 위해 춘천지방법원에 모인 납북귀환어부와 유족들.

지난 7일 오후 30여명의 납북귀환어부들이 춘천지법에 모였다. 1971년 8월 우리 해역에서 납북됐던 속초와 고성 소속 승운호, 제2승해호, 제6해부호의 선원들이었다. 북에 납치됐다가 천신만고 끝에 1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후 간첩 누명을 쓰고 국가보안법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이들의 재심 심문기일이었다.

운명의 장난일까…이날은 북에서 풀려나 속초항으로 돌아온 1972년 9월7일 이후 정확히 50년이 지난 날이었다.

판사는 납북귀환어부 30여명에게 일일이 발언 기회를 줬다.

법정에 선 어부들은 긴장한 듯 떨며 지난 세월을 되짚었다. 때로는 울먹였고 때로는 간곡히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요청했다. 고향에 돌아온 후 물고문, 전기고문, 고춧가루 고문과 매질을 당했던 일을 털어놓았다.

이들은 고국 땅을 밟자마자 가족의 품이 아닌 수사관들이 기다리는 여인숙으로 끌려갔다. 처벌 이후에도 감시와 가족들을 향한 연좌제의 고통이 50년간 이어졌다. 피해 어부들은 “가혹행위를 당하기 싫어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해도 뭘 알아야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몰라 거짓말도 못했다. 공소장도 잘못 된 게 많았다”며 “재심에서 반드시 무죄를 받아 명예를 되찾겠다”고 입을 모았다.

■재판정에서 쏟아낸 피맺힌 절규=이날 재판에 참석한 납북귀환어부들에게 판사는 일일이 발언 기회를 줬다. 그리고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끔찍한 폭력과 고문의 기억을 털어놨다. 30여명의 납북귀환어부가 한 자리에 모인 것도, 모두가 자신의 피해를 진술할 기회를 받은 것도 이례적이었다. 이들의 증언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납북귀환어부 A씨 “납북 됐다가 돌아온 어부 161명이 14일 동안 속초시청 3층에서 불법으로 감금된 상태에서 5명 또는 7명씩, 굴비 엮듯이 여인숙에서 조사를 받고 시청에 다시 돌아오길 반복했다. 구타는 기본이고 심지어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 그런 식으로 많이 당했다. 당시 15~16살이었다. 구속이라는 것도 몰랐다. 어른들이 그냥 다 알아서 하는 줄만 알았다. 재판장님 정말 15~16살 소년에게 반공법·국가보안법 처벌한 건 잘못됐다.”

납북귀환어부 B씨 “당시 속초시가 아니고 속초읍사무소였다. 눅눅한 창고에서 고문을 받았다. 뒤에 옆에 있는 사람이 비명 소리가 들리고 (조사관이) ‘했지?’ 라고 물으면 ‘예’ 라는 소리밖에 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이러면 정말 가혹한 행위를 당하기 때문이다.”

납북귀환어부 C씨 “지령을 말하라고 했다. 그래서 ‘저는 지령 같은 걸 받은 적 없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저를 특별히 더욱 고문을 했다.”

납북귀환어부 D씨 “ 배우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지령을 받아왔다며 야구방망이로 때리거나 전기찜질을 당했다. 전기로 지지고 정신도 없었다.”

납북귀환어부 E씨 “앞서 이야기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것 처럼 다 똑같은 얘기다. 근데 사실이 그랬다. 50년간 부인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알게될까봐 두려워하며 살아왔다. 고문을 당했던 여인숙 옆에 극장이 있었다. 납북되기 전에 많이 갔던 곳이다. 죽을 때 까지도 잊지못한다. 얼마 전 당시 어부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데 모두 똑같이 나처럼 끔찍한 가혹행위를 당했다”

■유족들에게도 이어진 고통=이미 고인이 된 선원 대신 유족들도 대거 이날 재판에 참석했다. 이들은 납북귀환어부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를 이어 사찰과 감시, 취업 제한 등의 2차 피해를 겪었다.

납북귀환어부 유족 A씨=“취업도 안 되고 정말 많은 피해를 많이 입었다. 납북어부들이 간첩으로 몰려 식구들까지 취업을 못할 정도면 억울한 일을 겪고 살아야 했다.”

납북귀환어부 유족 B씨=“50년 전 오늘 지금 이 시간쯤 아버지가 북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을 것이다. 승운호 선원 23명의 가족들은 모두 귀향을 기대했지만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시청에 가둬놓고 고통을 받았다. 아버지는 이후 취업도 못하고 아무도 배에 태워주지도 않았다. 선원 23명 중에 21명이 오늘 이 자리에 나왔는데 남은 두 분을 반드시 찾아 다함께 무죄판결을 받고싶다.”

아픈 기억과 트라우마를 끄집어내 법정에서 직접 진술한 납북귀환어부들에게 재판부는 감사를 표했다. 재판장은 “힘든 이야기들을 감정을 잘 제어해 저희에게 전달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고 말했다.

납북귀환어부들과 가족들, 지역사회의 이목이 쏠린 이번 재판의 다음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고령의 피해자들은 하루 빨리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 만을 고대하고 있다.

◇납북귀환어부 제2승해호 선원 김상호씨

■무너진 삶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날 법원에서 만난 제2승해호 선원 김상호(속초 청호동·81)씨는 본보 취재진에게 납북 당시의 공포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털어놨다. 그는 납북 당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었다. 부인과 아이들, 어머니 아버지까지 부양해야 했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의 피난민이었던 그는 납북 당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걱정에 사로잡혔다. 김씨는 “내가 없으면 부양하던 식구들이 어떻게 될 지 걱정이 많았다. 이북 출신이라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도 있었다” 고 당시를 회상했다. 속초 청호동 아바이마을의 허리도 펴기 힘든 허름한 집에서 힘겹게 살았지만 결혼도 하고 아들 둘과 딸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납북 이후 가정이 무너졌다. 남편이 납북된 후 빨래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한 김씨의 부인은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북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다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시청과 여인숙으로 끌려가 고문과 매질을 당했으며 평생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공사장에서 일하거나 다시 고기잡이배에 오르기도 했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김씨의 부인은 결국 30여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고문에 시달리고 집에 와서도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다. 경찰들이 수시로 감시하니 무슨 벌이를 제대로 하겠나. 연좌제도 은연 중에 남아있어 아이들도 힘들었다. 평생을 가슴 졸이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연좌제의 고통,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승운호 선원 고(故) 김도인씨의 아들 김모(고성·67)씨는 아버지의 납북 당시 고교 1학년이었다. 아버지는 납북됐다가 돌아온 후 병마에 시달렸고 10년이 채 되지 않아 끝내 숨졌다. 아버지가 병마와 싸우는 동안 집안은 무너졌다. 당시 김씨의 누나와 매형이 모두 직업군인으로 복무 중이었으나 강제전역 당했다. 아버지가 일할 수 없고 이미 사회에 진출했던 가족들도 실직하며 고등학생인 김씨가 대신 오징어잡이 배에 올랐다. 어머니는 머리에 미역을 지고 홍천까지 가서 팔아야 했다. 취업에 번번이 실패한 동생은 서울로 떠났지만 불의의 사고로 숨졌다. 살기 위해서는 가족이 모두 일터로 내몰릴 수 밖에 없었다. 김씨는 신원조회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 천신만고 끝에 직장을 구했지만 진급 등에서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김씨는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자식들, 후손들이 더 이상은 내가 겪은 피해를 겪지 않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납북됐다는 이유로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기록이 지워지지 않고 있으면 후대에 또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른다” 며 “안 당해보면 절대 모른다. 눈물이 나서 말을 못할 지경이다. 납북귀환어부들에 대한 재심이 더 이상 늦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무죄를 바란다. 우리가 당한 일과 피해에 대해 정당한 보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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