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뉴욕:핫플 연재 12편이 모두 끝났습니다. 최재용 한국은행 강원본부장이 뉴욕의 경험을 토대로 2022년 1년간 매달 2편씩 연재를 했습니다. 누구나 알만한 소위 핫플레이스들의 과거와 현재, 그에 얽힌 많은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하지만 12편으로 뉴욕을 알리기는 부족해 강원일보 홈페이즈를 통해 못다한 이야기를 들려드릴 계획입니다. 앞으로 2주마다 한 회씩 다양한 뉴욕의 모습을 강원일보를 통해 전하겠습니다.
(13)유럽을 향한 미국의 꿈, 소호(SoHo)
뉴욕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에도 뉴욕에 있는 ‘소호(SoHo)’라는 지명에는 상당히 익숙했던 기억이 있다. 가난한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뉴욕의 거리. 돈은 없지만미래를 향한 꿈과 낭만이 존재했던 순수한 아티스트들의 삶터. 여러 이미지가 이 소호라는 두 글자에 깃들여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우리에게 소호가 특별히 익숙한 이유 중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그의 인생 대부분을 살았던 장소가 바로 이곳 소호였다는 사실도 큰 몫을 차지할 것 같다. 백남준이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맨해튼에 도착했던 1964년을 기점으로 이후 그의 전시회가 거듭 대성공을 거두면서 아예 죽을 때까지 정착하여 예술혼을 불살랐던 공간이 바로 이곳 소호였다. 당시 소호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했던 리히텐슈타인(1923~1997), 댄 플래빈(1933~1996) 같은 미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비디오 아트라는 독보적인 영역에서 세계적 아티스트로 우뚝 섰던 백남준에 대한 기억이 알게 모르게 맨해튼 소호를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뉴욕이 현대미술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술사의 흐름을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옮겨 놓았던 바로 그 시기, 2차대전 직후부터 60년대 70년대에 미국발 현대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커뮤니티가 바로 맨해튼 소호였다.


소호는 ‘휴스턴 남쪽(South of Houston)’의 약자로 맨해튼을 가로지르는 중심거리 휴스턴 스트리트(Houston Street) 남쪽 구역을 이른다. 구체적으로는 휴스턴 스트리트 남쪽부터 차이나타운이 시작되는 커낼 스트리트(Canal Street) 북쪽까지 43개 블록의 구역을 지칭한다. ‘소호’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건 1960년대 들어서였다.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에서 꽃을 피웠던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작가들이 맨해튼 남쪽 공장지대 건물의 버려진 다락방들에 하나둘 모여들면서 이들 아티스트 거주지역을 통틀어 ‘소호’라고 부른 것이 그 발단이 되었다. 이후 한동안 소호는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의 실험적인 갤러리를 통칭하는 일반명사처럼 불리게 되는데, 위에 언급한 백남준, 리히텐슈타인을 비롯하여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수많은 표현주의 작가들이 이곳에서 배출되고 활동하였다.
사실 추상 표현주의가 소호에서 그 빛을 발하기 전까지 미국의 미술은 그저 일개 지역 미술 또는 파리를 중심으로 형성되던 국제적 흐름을 모방하는 한낱 로컬 미술에 불과했다. 그러나 2차대전을 거치면서 최대승전국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급격히 높아지고 유럽미술에 싫증을 느끼고 무언가 새로운 예술 조류를 찾아 헤매던 글로벌 미술사의 흐름에 편승하면서 뉴욕이 유럽을 대체하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새로운 전초기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 당시 소호를 대표했던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로는 쿠닝(William de Kooning), 호프만(Hans Hofmann) 등 유럽파와 폴록(Jackson Pollock), 노이만(Barnett Newman) 등 미국파가 있었다. 이후 미술양식은 좀 더 미국적이고 대중적인 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이런 흐름의 대표주자가 바로 1962년 혜성처럼 등장한 앤디 워홀(Andy Warhol)이다. 이른바 예술과 상업을 결합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미술, 소위 ‘팝 아트’라 불리는 현대미술의 서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추상 표현주의가 발전하다 미국적인 양식으로 방향을 잡고 예술과 상업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팝 아트’라는 신조류가 형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 후 현대미술은 다양한 실험과 굴곡을 거쳐 오늘날 양식으로 진화하게 된다. 이제 뉴욕은 더 이상 로컬이 아닌 전세계 현대미술의 메카이자 구심지로 굳건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지금의 소호는 예전의 소호와는 많이 다르다. 꿈과 낭만으로 가득한 예술인 지역으로서의 이미지를 잃어버린 지는 한참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소호는 작고 독특한 편집매장, 개성 있는 레스토랑, 다양한 독립서점 등 새롭고 재미있는 볼거리들로 가득하다. 부근에 있는 뉴욕대학교(NYU)의 젊은이들로 늘 북적거려서인지, 그리니치빌리지(Greenwich village) 주변의 젊고 신선한 거리로서의 명맥은 계속되고 있다. 실제 이곳 소호나 그리니치빌리지의 임대료나 주택가격은 이미 맨해튼 내에서도 비싸기로 정평이 나 있을 만큼 비싸다. 싼 임대료로 예술가들이 몰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설로만 남아 있다. 그래도 여전히 각양각색의 숍, 레스토랑, 유명브랜드의 플래그십스토어, 재즈바 등 문화적 다양성이 가득한 흥미롭고 실험적인 구역으로서는 개인적으로 맨해튼 내 최고라 생각한다.
특히 힙하고 젊은 거주지역으로 브루클린이 뜨면서 소호 동쪽 브루클린 브리지까지의 로어 이스트(lower east) 지역까지 포함해 문화적 다양성이 가득한 구역으로 점차 거듭나고 있다. 브루클린 이야기가 나와 한 마디 덧붙이자면 지금도 맨해튼 로어 이스트나 브루클린 거리를 걷다 보면 곳곳에 대형 길거리 낙서(Grafitti)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이런 그래피티 문화도 1960년대 추상 미술과 상업이 결합될 무렵 시작되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그래피티를 그저 지저분한 대형 길거리 낙서 정도로만 인식하고 지역 이미지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시선이 절대 다수였지만, 이젠 지역 문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현양식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훨씬 많아졌다. 그래피티는 현대미술이 거리로 파생되어 대중화한 좋은 예이다. 과거 이곳 소호에서 비롯된 미술 조류가 힙한 거리문화와 만나면서 이같은 대중적 그래피티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이곳 소호가 얼마나 대중예술,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할 수 있다.

맨해튼에 살면서 시간 날 때마다 다녀보는 코스가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코스가 바로 소호 돌아보기였다. 지하철로 프린스(Prince) 스트리트에 내려 근처에 있는 독립서점 하우징웍스(Housingworks) 북스토어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주변 허름한 스시집이나 피자집(유명피자집이 밀집해있다)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빈티지숍이나 새로 생긴 편집매장 등을 구경하다 보면 반나절이 휙 지나는데, 언제 가봐도 새로운 볼거리가 나타나는 게 놀랍고도 신기했다. 오프라인 스토어가 거의 없기로 유명한 의류브랜드 ‘슈프림(Supreme)’의 플래그십스토어도 맨해튼내 소호에 달랑 하나 있는데, 대기라인이 너무 길어 한참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도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스토어 직원(대부분 흑인이다)들이 사람들을 길게 늘어세우고 한 사람씩 들여보내는데 지나가던 사람도 호기심에 그냥 줄을 서보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줄 세우는 것도 아마 이들의 마케팅 전략인 것 같다. 한참을 기다려 좁은 매장안으로 들어서면 고가의 티셔츠, 바지, 재킷들이 있는데 비싸긴 해도 워낙 유명 브랜드인 데다 언제나 새롭고 힙한 디자인에 품질이 워낙 좋아 나도 모르게 구매충동이 일어난다. 결국은 그 긴 줄을 서서 기다렸다는 보상심리가 작용해서인지 그중에 제일 싸고 점잖아 보이는 티셔츠를 하나 사들고 나오는 걸로 마무리된다.

유명 브랜드의 샘플 세일도 이곳 소호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간혹 저렴한 가격에 명품 브랜드를 득템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뉴욕대 재학생이거나, 뉴욕 소개 책자에 자주 나오는 맛집이나 상점을 찾은 관광객이거나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자주 눈에 뜨인다. 화보를 찍는 모델과 사진작가들에게도 이곳 소호의 오래된 골목은 배경화면으로 많이 선호된다. 거리 곳곳에서 사진을 찍는 전문가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온라인이 대세인 디지털 시대에도 가장 뉴욕스러운 다양성이 살아 있으면서 새로움과 오래됨이 교차하는 문화 해방구 소호가 내뿜는 매력은 무시하기 어렵다. 오히려 디지털이 발전하면 할수록 소호가 지닌 아날로그적 매력은 더더욱 그 깊이를 더해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최재용 한국은행 강원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