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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개학(開學)과 재학(再學)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학생들이 있는 집집마다 개학 준비로 분주하다. 중국에서 방학을 방가(放暇)라고 해서, 휴가(休假)의 뜻이 강하다면, 한국에서의 방학(放學)은 학교 밖에서 풀어놓고(放) 스스로 배우는(學) 배움의 연장이다. 한국인에게 배움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우선순위다. 전쟁 통에도 피난지에서 천막을 쳐놓고 배웠고, 공장 끝나고 야학을 하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배워야 하고, 병이 들어도 배워야 하고, 나이 들어도 배워야 한다. 코로나 전염병도 배움을 멈출 수 없으며, 어떤 이유든 배움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며, 배움을 지속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다. 오죽하면 죽고 나서도 후손들에게 자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제사를 지낼 때 배우다(學) 살다간(生) 사람이라 써 달라고 하였을까?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평생 배우며 사셨던 우리 집의 어르신 나타나세요!’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성공한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아닌 평생 배우며 살았던 우리 아버지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유교 경전의 대표자인 '논어' 첫 구절은 배움의 기쁨(悅)에 대한 선언이다. 명품을 줄서서 사고, 새 차를 사는 기쁨도 있지만, 중독성이 강하고, 더 큰 물질적 욕망을 동반하기 때문에 소모적이고 일시적인 기쁨이다. 배움을 통해 꽉 막혔던 내 생각의 둑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생각과 만나 신세계를 만나는 기쁨은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喜悅)이다. 거기에 배움을 함께하는 친구(朋)가 있다면 열락(悅樂)의 인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배움을 좋아하는 호학(好學)이나 모르는 것을 묻기 좋아하는 호문(好問)은 인간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한국인에게 배움은 책 속의 지식만은 아니었다.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 사람 공경하고, 신의를 지키며 일처리 잘하고,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학교 문턱에 가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미 배움을 이룬 사람이라고 여겼다. 학력은 높지만 도리를 모르고 인성이 안 된 사람은 헛 배웠다고 비난 받기도 한다. 배움은 지식으로서의 축적이 아니라 내 삶에 반영되어야 한다. 학습은 배움(學)이 습(習)이 되어 내 삶에 구동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배움은 다섯 가지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넓게 배우고(博學, 박학), 깊이 묻고(審問, 심문),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신사). 명확하게 판단하고(明辯, 명변), 독실하게 실천(篤行, 독행)하는 과정은 배움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과정이다. 김장독을 제대로 묻으려면 넓게 파야하고, 깊게 묻어야 하고, 생각하고 파묻어야 하고, 제대로 독을 놓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학생들은 개학(開學)하고 어른들은 재학(再學)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밀쳐놓았던 책을 다시 꺼내고, 나의 삶을 치열하게 질문하여 부족한 것은 묻고(問), 넘치는 것은 깊이 묻어(埋) 버려야 한다. 이제 배움은 출세나 과시의 도구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일에 온전히 사용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되어야 한다. 배움을 갖고 태어난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라면, 열심히 배워서 깨우치는 학이지지(學而知之)는 되어야 한다. 그것도 안 된다면 열심히 반복해서 깨우치는 곤이지지(困而知之)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배움이 중지된 삶은 정신적인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다. 꽃이 피고(開花), 배움이 열리는(開學) 때에 마음의 문을 열어(開心) 나의 수준을 높여 더 좋은 삶으로 나아가는 개선(開善)하기 딱 좋은 때이다. 다시(再) 공부(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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