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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마산방어전투, 기념관 건립해 기억해야
기념(記念).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 전쟁기념관은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산방어전투기념관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과 자유민주주의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잊는다면 아픈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마산방어전투는 지난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마산 일대에서 한미 동맹군과 인민군 간 벌인 전투다. 이 기간 핵심 격전지였던 서북산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뒤바뀌었고 인민군 4,000여명과 미군 1,000여명이 희생됐을 정도로 큰 규모의 전투였다. 하지만, 미군 주도 전투라는 이유 등으로 기념관 하나 없이 잊혀 가고 있다.이러한 현실 속 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여러 선양 사업이 진행되면서 점차 시민들과 지역사회에서 마산방어전투가 알려졌다.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의 장이 될 기념관 설립의 필요성 또한 커지고 있어 주목을 모으고 있다.■최초 한미연합 작전= 1950년 8월 1일 북한군은 남침 36일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마산 현동 검문소에 집결했다.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쟁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로 구성된 북한군 6사단 7,000여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확보 후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이 일대를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250㎞ 넘는 마산으로 단 2일 만에 이동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마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과 사수하려는 국군과 미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마산방어전투에서 아군의 승리로 북한군의 부산 점령을 막을 수 있었고, 국군과 UN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또한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가져왔다.마산방어전투가 최초 한미 연합 작전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순복 경남대 군사학과 교수는 "최초 한미연합 작전으로 알려진 다부동 전투는 8월 13일 시작됐지만, 마산방어전투는 그보다 5일 앞선 7일부터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며 "또한 연합 작전은 한명이 지휘체계를 잡고 전투를 지휘해야 하는데 다부동 전투의 경우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마산방어전투는 국군이 미군에 배속되어 하나의 지휘체계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하 교수는 "마산방어전투는 최초의 한미연합작전임과 동시에 한미동맹 출발점이다"며 "연합작전을 통해 피를 나누며 싸웠기에 동맹이 강해졌기에 그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기념관 설립해 선양활동 진행해야= 나라의 운명이 달린 전투였지만, 마산방어전투를 기억할 전쟁기념관 하나 없을 뿐만 아니라 육군사관학교에서 발간한 ‘6·25전쟁 60대 전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관련 시설은 해병대진동리지구 전첩비, 서북산 전적비뿐이다. 달성에서 진해까지 낙동강 방어선은 미군 부대가 주력이었기에 그동안 관련 전투들은 관심이 떨어졌다.잊힌 전투를 기억하고자 지난 2021년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가 창립이 됐고, 다양한 선양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은 2016년 진해 미 해군 사령관의 추천서를 받아 미국 정부 서류저장처에 보관된 마산방어전투 당시 미 25사단의 전투일지를 확보했다. 이후 3년간 A4용지 500매 분량의 일지를 직접 번역해 책 ‘마산방어전투’를 출간했다. 그는 금속탐지기를 미국에서 직접 사 와 전투일지에 나타난 전적지를 100차례 이상 답사해 탄환, 포탄 파편, 군복 단추 등을 발굴하기도 했다.최근에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전적지를 답사하며 마산방어전투를 알리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처음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해 전쟁사 전문가들이 마산방어전투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향후 기념사업회는 기념관 건립 운동과 더불어 토론회, 사진전 등을 개최할 계획이다.■기념관 건립 용역 조사 곧 시작= 창원시는 오는 10월 중 '(가칭) 마산방어전투 재조명 및 기념관 건립 기획 용역' 입찰 공고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용역에는 전사 연구와 더불어 부지 선정 등에 대해 논의될 예정이다. 창원시 관계자는 "마산방어전투라는 명칭 자체가 전쟁사에 없다 보니 객관적인 자료를 조사할 예정이다"며 "미군 측에는 자료가 있지만, 한국에는 자료가 부족한 게 현실이다. 용역 자료를 기반으로 기념관 부지와 이름을 정할 계획이다. 용역 기관은 최소 5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홍남표 창원시장 또한 당선인 시절 인터뷰에서 기념관 건립에 관해 관심을 표했다. 홍 시장은 과거 "낙동강방어선 주요 전투 중 포항·영천·다부동·박진 전투는 많이 알려진 반면, 마산방어전투는 별로 조명을 받지 못 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마산의 뜻있는 분들이 민간 차원에서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를 결성해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마산방어전투 전적기념비와 기념관 건립도 국가보훈처 차원의 선양사업과 연계해 추진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민간 차원의 기념사업회의 활동과 지자체 차원의 공론화 과정 등을 거치면서 마산방어전투 의미를 지역은 물론 전국에 널리 알리고, 이를 토대로 기념사업의 방향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고 밝힌 바 있다.■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나라를 살린 마산방어전투, 기념관 통해 잊지 말아야 됩니다."올해 93세인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은 뚜렷이 이렇게 말했다. 배 회장은 90세가 넘는 고령이지만, 직접 마산방어전투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전적지를 답사하고 있다. 만약 그가 미25 사단 전투 일지를 번역해 책을 출판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이 전투는 잊혀 왔을 것이다.그는 "기념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지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시설"이라며 "6·25전쟁 초기에 마산을 방어해 부산을 지켰기에 나라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직 기념관이 없어 잊혀 가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지만, 창원시에서 용역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상당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배 회장은 앞으로도 기념사업회를 통해 시민들에게 마산방어전투를 꾸준히 알릴 계획이다. 방어전투 참전자 유해와 유품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등산로 하나 없는 고지를 올라 직접 발굴을 나선 것도 그였다. "다양한 선양 활동과 언론 등을 통해 점차 시민들이 마산방어전투를 알아가고 있어 뿌듯합니다. 전투를 직접 겪은 마산 지역 주민들도 기념관 건립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지어질 기념관에 전시될 자료와 증언을 모으고, 유품을 발굴할 생각입니다." 경남신문=박준혁 기자사진1. 마산방어전투 기념사업회는 지난해 12월 마산 일대에서 마산방어전투 전적지 답사를 진행했다. 출처 박준혁 기자사진2.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는 지난 6월 처음으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출처 박준혁 기자사진3.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이 지난해 12월 마산방어전투 전적지들 시민들과 답사하며 전사와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출처 박준혁 기자사진4.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 출처 박준혁 기자사진5. 책 마산방어전투 표지.
전쟁 후 남은 사람들의 비극, ‘빨치산’
‘빨치산’은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자 분단된 남북 민족분열의 비극을 표출하는 상징이다.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했으며 노동자나 농민 등 비정규 군인들로 무장된 유격대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전국의 산지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특히 호남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 되돌아 가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의 험준한 사악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저항했고 한국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 1월부터 4월까지 전남에서 한국군의 게릴라 대규모 토벌작전(3기)에 6,921명의 빨치산이 사살되고 603명이 생포됐다.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진압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경찰, 민간인은 7,287명에 달한다.■한국전쟁은 끝났지만 귀순하지 못한 빨치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호남 지역에 남아있던 북한군은 퇴각하지 못한 채 지리산 인근에 입산해 빨치산이 됐다.북한군이 후퇴하자 호남·영남·충청 지역에 있던 인민군 및 당 요원들은 퇴로가 차단된 채 남한에 남겨진 이들이었다. 빨치산은 남한의 공산주의자와 북한군 패잔병, 유격대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펼쳤다.패잔병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인민군이 다시 남하할 때를 대비해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받고 군·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을 한 것이다. 특히 관공서를 습격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50년 10월 이후 군경합동작전이 전개됐고 백야전 전투사령부가 창설돼 빨치산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병력 이외에도 경찰병력도 많이 동원됐다. 1950년 12월 16일에는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들은 빨치산 진압작전을 위해 지리산 중심의 주요 고지를 포위·수색하고 근거지를 공격했다. 군경의 주요 시설을 경계·방어하면서 첩보활동을 펼쳤다.군경은 빨치산 진압과 더불어 귀순 유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군인과 경찰은 지리산 인근에 ‘삐라’(전단지)를 대량으로 배포해 빨치산의 귀순 유도를 했지만 빨치산들은 귀순보다는 저항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빨치산은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그 산하 6개 지구대를 창설해 끝까지 저항했다. 6개 지구는 무등산 광주지구, 담양 추월산 가마골 노령지구, 구례·광양 백운지구, 화순 모후산 지구, 장흥 유치지구, 영광·함평 불갑산 지구 등이었다.■빨치산의 근거지, 화순 백아산 전투=빨치산 세가 가장 강했던 곳은 전남도당 본부가 있던 화순 일대로, 이곳에서는 1950년 10월부터 1952년 4월까지 1년 6개월동안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은 인민군 점령기에 광주에 설치됐던 당 본부를 화순군 백아산 기슭에 있는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로 옮겼다. 백아산은 해발 810m로 산비탈이 가파른데다 고지가 여러 곳이라 한 곳을 점령당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쉽고, 화순 모후산, 곡성 통명산 등으로 이동하기에도 용이했다. 또한 화순은 화순 탄광 노동자들로 조직된 좌익 세력이 강했으며,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 이후 미 군정의 검거를 피해 많은 좌익 인사들이 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빨치산은 지리산 곳곳에 거점을 두고 군·경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경찰서·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무기약탈 등을 일삼았다.이에 한국 정부는 1950년 10월부터 국군 11사단을 내려보내 이른바 ‘백아산 소탕전’을 벌였다. 이 때 국군은 ‘성벽을 굳게 하고, 들에 있는 것을 말끔히 치운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폈다. 백아산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소개(疏開·폭격 등에 대비해 대피시키는 것)하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화순군 이서면 21개 마을, 북면 24개 마을, 담양군 남면 대덕면 5개 마을 등 모두 50개 마을이 소각됐다.4월이 되자 11사단을 대신해 8사단이 호남으로 내려왔고, 예하 부대와 전투 경찰대, 청년 방위대 병력을 지휘하여 백아산 지구, 장흥군 유치면 구사봉 지구에서 준동하는 잔류 세력 소탕 작전에 나섰다. 전투가 길어지자 1951년 11월에서 1952년 2월 사이에는 미군 폭격기를 동원해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네이팜탄(소이탄)을 투하해 백아산 일대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은 폭격기 1대를 추락시킬 정도로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많은 병력을 잃었다.백아산 일대에는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된 이후에도 잔존 빨치산의 활동이 이어졌으나, 1954년 2~3월 백야전 사령부의 토벌 작전으로 부대장·위원장 등 남은 지휘관마저 대거 잃은 끝에 1955년 3월 섬멸된다.■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빨치산과 교전이 치열했던 화순에서는 민간인 피해도 많았다. 낮에는 국군이 마을을 불태우거나 주민들을 ‘빨치산에게 부역했다’며 살해하고, 밤에는 빨치산에게 우익 인사의 가족이라거나 ‘협조하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살해당했다. 당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였다.이와 관련한 진실 규명은 지난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한 뒤에야 윤곽이 드러났다.제1기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1950년 8월부터 1952년 4월까지 화순군 9개 읍·면에서 빨치산에 의해 111명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됐다. 진화위는 화순에서 추가로 31명의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자행됐다. 제1기 진화위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까지 화순·담양·장성·영광·함평 등지에서 291명의 주민이 국군 제11사단 20연대 1·2·3대대, 9연대 2대대에 의해 ‘빨치산’ 혹은 ‘부역자’라는 혐의로 사살되거나 연행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희생자 수는 화순이 사살 56명, 행방불명 5명으로 가장 많았다.진화위는 ‘견벽청야’ 작전을 수행하던 중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해 작전 상의 위험을 제거하고 빨치산 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해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분석했다.최근 화순 백아산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도 이어지고 있다. 육군 제31보병사단은 지난 3~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2000㎡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앞서 31사단은 지난해 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총 3600㎡에서 유해 발굴 작전을 벌인 끝에 6·25 전사자 유해 한 구와 탄피 등 군용품을 발굴했다./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 인터뷰“늦게 오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지요. 아직까지 한국전쟁 당시 피해자들의 5%밖에 밝혀지지 않았어요. 국군, 빨치산을 막론하고 국가 차원에서 피해자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합니다.”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은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과 군·경의 충돌이 격했던 당시 피해에 대한 조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박 소장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지리산 빨치산 등을 연구해 온 역사연구가다.박 소장은 빨치산은 결국 남·북의 정치적인 이득에 따라 파생된 단체라고 설명했다. 1948년 이승만과 한민당 등이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노선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해 제주4·3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이 10·19 여순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빨치산 활동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특히 호남 지역에서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인한 피해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정학적으로 호남은 평야 지대라 농경지가 많고, 그만큼 소작농이 많아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공산당의 주장에 동조할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군으로부터 가족이 살해당한 피해자, 빨치산의 요구에 못 이겨 입산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피해자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하지만 빨치산의 구체적인 전투과정과 피해 상황 등을 밝힐 연구는 유독 미진했다고 설명했다. 사회에 만연한 ‘레드 트라우마’ 때문에 공산당과 관련된 역사적 연구를 하려는 사람도 없고, 그와 관련된 논문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언을 해 줄 피해자들은 마을 이웃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는 장면을 목도해 트라우마가 심하다는 점, 가족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 탓에 당시 상황을 설명할 이가 남아있지 않은 점 등을 꼽았다.그 날의 진상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견벽청야’ 작전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립된 삶을 산 탓에 피해 사실을 알릴 방법을 알 방도가 더욱 없다고 밝혔다.박 소장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학살의 주축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군’이었다. 대략 국군이 20명을 살해하면 빨치산에 의해서는 1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국군이 수적으로 압도적일뿐 아니라 작전지역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는 작전을 썼고, 좌익 부역자 색출 등을 명분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살해했다는 진술이 잇따르고 있기도 하다.
반공vs친공 갈등 휩싸인 중공군 포로 2만명 제주서 '분리작전'
2만 중공군 포로는 제주도에 왜 왔을까?3년1개월(1129일) 동안 벌어진 6·25전쟁에서 중공군 포로는 약 2만1,700명으로, 미군 4,439명보다 5배나 많았다.전쟁이 한창일 당시 포로수용소는 육지와 떨어진 섬인 제주도가 후보지였다. 1950년 말 중공군의 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자, 제주도의 포로수용소 설치는 유력해졌다. 다만,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제주도가 피난민으로 초만원이 된 점, 이 섬은 임시정부가 들어설 최후의 보루로 여기면서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결국, 육지와 비교적 거리가 가깝고 물 공급이 가능한 거제도가 포로수용소로 낙점됐다.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생포되거나 항복한 포로 송환은 쟁점이 됐다. 포로수용소는 냉전과 이념 대결의 축소판으로 또 다른 전쟁터였다. 2만명에 달했던 중공군 포로들은 반공(反共)과 친공(親共)으로 대립했고, 서로를 죽이고 학대하는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폭동과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자, 유엔군사령부는 1952년 2월 ‘분리 작전’에 돌입했다. 그해 7월까지 약 2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 포로를 거제도에서 제주도로 보냈다.당시 중화민국(대만)으로 가길 원했던 반공포로 1만4,000여 명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지역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송환을 원했던 친공포로 5,900여 명은 제주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부지에 수용됐다.친공포로들은 1952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3주년을 맞아 시위를 벌였다. 미군 2개 소대가 진입하는 과정에서 포로 45명이 사망하고, 120명은 부상을 당했다.유엔군사령부는 “폭동(시위)은 집단 탈주를 위해 시작됐으며, 포로들은 탈옥 후 한라산 빨치산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이후 경비를 맡은 미군과 친공포로의 갈등은 심화됐으며, 포로수용소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했다.반공포로가 수용된 모슬포지역에서는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주민들은 ‘사제 수류탄 폭발 ’, ‘포로끼리 패싸움 후 시체 유기 사건’ 등을 언급, 추가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당시 모슬포에는 육군 제1훈련소(1951~1956년)가 설치됐고, 한국군도 포로수용소 경비 업무를 맡았다. 지붕으로 얹은 양철판 밑에 기름을 먹인 종이(루핑)를 바른 수용소 환경은 열악했다.“포로수용소 건물은 나지막하고 검은 루핑 지붕이어서 여름철에는 실내 열기가 대단했다. 나무판자로 물방아와 비슷한 선풍기를 만들어 포로들이 줄을 교대로 당기며 바람을 만들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군부대를 출입했던 이발사 서병수씨가 당시 수용소의 열악한 사정을 증언한 내용이다.중공군 포로들은 채소밭을 일궜고, 미군의 감시 아래 수용소 인근 송악산에 오르거나 바닷가에서 미역을 채취하기도 했다.설리반(sullivan) 군종신부는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포로들은 늪지를 매립하고 돌을 나르며 모슬포성당 건립 공사에 투입됐다. 성당은 ‘통회의 집’으로 불렸다. 포로들이 한국에 많은 피해를 입힌 죄를 뉘우치며 지은 집이라는 뜻을 담았다. 나중에는 사랑으로 포로들을 용서하자는 의미로 ‘사랑의 집’으로 변경됐다.1953년 6월 8일 전쟁포로 송환 협의가 이뤄졌고,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됐다.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 간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정전 협정 체결 전인 1953년 초부터 반공포로와 교섭하며 이들의 대만 송환을 준비했다.1953년 7월 29일 대만 정부는 제주에 있는 반공포로들에게 출판물 및 영상물 제공과 함께 위문단 파견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중공군 포로의 대만 행은 국민당 정부가 내전에는 졌지만, 이데올로기에서는 승리했다고 선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한 달 뒤인 8월 28일 대만 정부가 파견한 위문단이 제주도에 도착했다. 대만 공군은 수송기 8대를 동원, 37톤의 위문품을 전달했다. 당시 대만 언론에 소개된 위문품은 1인 당 설탕 1홉, 소고기·채소 통조림 1개, 파인애플, 바나나 2개, 러닝셔츠 1벌이었다.1년 남짓 제주도에 수용된 1만4,000여 명의 반공포로들은 대륙 행을 거부하며 팔뚝에 ‘반공(反共)’이나 ‘살주발모(殺朱拔毛)’ 같은 문신을 새겼다. 홍군 총사령관 주더(朱德)를 죽여 버리고 마오쩌둥(毛澤東)을 없애겠다는 뜻이다.반공포로 1만4,000여 명은 제주도를 떠나 1954년 1월 20일 인천항에서 미군 수송선에 올랐다. 1월 23일 대만 지룽항에 도착한 이들은 반공의사(反共義士)로 대접받았다.제주비행장에 수용됐던 친공포로 5,000여 명도 선박과 육로를 통해 1953년 8월부터 9월까지 본국으로 돌아갔다. 제주일보=좌동철 기자■ 김웅철 향토사학자 인터뷰“70년 전 중공군 포로 2만명이 1년 넘게 제주도에 수용된 것은 전쟁사나 외교사에 중대한 사건이다. 제주 섬에서 벌어진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갈등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자, 이념 갈등이었다.”역사사진 자료집 ‘강병대(육군 제1훈련소) 그리고 모슬포’를 발간한 김웅철 향토사학자(73)는 반공포로들이 도열, 이국땅에서 숨진 동료의 시신에 청천백일기를 덮고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담긴 귀중한 사진을 갖고 있다.김씨는 “중공군들은 모슬포~사계리 도로 개설과 모슬포성당 기초 공사에 동원됐고, 일부는 아일랜드 출신 설리반 군종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며 “채소를 즐겨먹으면서 농장대를 조직, 수용소 인근 밭에서 채소를 직접 재배했다”며 당시 생활상을 소개했다.이어 “포로들은 또 ‘자치대’를 조직,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군대식 열병을 했고, 양철 조각으로 만든 피리를 불며 애환을 달랬다”며 밝혔다.김씨는 “반공포로는 모슬포지역 3곳에, 친공포로는 현 제주공항 화물청사 인근 1곳에 설치됐는데 수용소 건립으로 민가가 철거되고 토지가 강제 징발되면서 마을주민들이 적잖은 피해를 봤다”고 했다.대정읍 상모리에는 중공군 포로수용소 건물 외벽이 남아 있다. 길이 20m, 높이 2m의 석축 벽에는 창틀 모양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김씨는 “냉전시대, 제주에 수용된 중공군 포로 70%가 대만 행을 선택한 것은 국제사회에 큰 이슈였지만, 지금은 수용소 터와 건물이 마늘밭(사유지)에 남아있고, 70년 넘게 방치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수용소 터를 매입하고 복원해 전쟁의 참상과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깨끗한 물·공기로 키운 청정 강원 명품 한우…한가위 ‘최고의 선물’
강원산 한우의 품질은 축복이다. 비결은 그다지 축복받지 못한 자연환경에 있다. 인간이 살기 버거운 높은 산 청정수와 맑은 공기로 키워냈다. 숙성 역시 높은 해발고도에서 이뤄지니 육질이 남다르다.추석을 앞두고 농축수산물 선물 상한액이 30만 원까지 오르며 강원한우를 찾는 주문이 폭주하고 있다. 강원지역 농·축협들은 앞다퉈 최고 품질의 한우 명절선물세트를 선보이고 있다.■횡성한우횡성은 예로부터 소와 인연이 깊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 사대문 밖에서 가장 큰 우시장이 횡성에 있어 유명세를 탔다.중부 내륙인 횡성은 일교차가 크고, 섬강 발원지로서 깨끗한 물, 면적 80% 이상이 산지인 청정 환경이 갖춰져 한우 키우기에 최적인 곳이다. 한우와 관련된 지명도 여럿이다. 횡성은 이 같은 기후와 지리 여건으로 인해 한우가 근육 사이에 지방층이 촘촘하게 자리 잡아 풍미가 뛰어난 특징이 있다.횡성군은 1995년 민선 1기 출범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한우 브랜드를 육성하기위한 ‘횡성한우 명품화 추진 전략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그해 9월 특허청에 ‘횡성한우’를 상표 출원했다. 이듬해부터는 한우 거세 시술, 읍면지역 한우연구모임회 결성, 축산물 유통센터 설치 등 명품화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2000년 횡성한우 특성화 전략이 수립돼 한우 사양 관리와 품질 고급화가 계속됐다. 2004년에는 횡성한우축제가 첫선을 보이며 횡성한우가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횡성한우는 전국한우능력평가대회, 축산브랜드 경진대회 등에서 대통령상 등을 휩쓸며 품질도 인정 받았다.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 공식 만찬에 메인 메뉴로 올라 인지도가 급상승했고, 2006년에는 횡성한우 지리적 표시제 등록도 이뤄졌다. 2009년에는 횡성한우 정체성 확립을 위해 ‘횡성한우 보호 육성에 관한 기본 조례’가 제정된 후 횡성한우 품질 인증 마크를 상표등록을 마쳤다.특히 2012년부터 횡성한우 세계화 전략을 마련, 2014년 홍콩 푸드 엑스포 참가에 이어 2016년 횡성한우가 첫 홍콩시장에 진출했다.횡성에는 1,300여 농가에서 모두 6만 1,000여 마리의 한우를 사육 중이다. 전국 한우 1.7%, 강원특별자치도내 한우 24%를 차지한다. 횡성한우는 고기 맛을 좌우하는 지방산 중 올레인산 함량을 측정, 횡성한우 품질인증시스템과 연계해 소비자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횡성한우만의 차별화를 만들고 있다. 차별적 품질 혁신, 사양 관리 개선으로 올레인산 함량 증진 방안을 만들어 고품질 횡성한우를 출하한다.■홍천 늘푸름한우‘홍천 늘푸름한우’는 소비자가 믿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생산, 프리미엄 한우로 주목받고 있다.높은 산, 맑은 물 청정지역 홍천에서 자란 늘푸름 한우는 전국한우협회 홍천군지부 회원들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개발해 생산하는 알코올 발효사료를 급여해 만든 최고 등급의 고급육만을 말한다. 이에 맛과 품질 면에서 단연 앞선다.홍천에서 사육된 엄선된 순수혈통의 한우 암소에 고급육 우량 형질의 수소 정액으로 인공 수정해 생산된 송아지를 5개월령 이전에 거세한다. 이어 체계적인 사양 관리로 30개월 이상 장기 비육, 생산된 육질 1등급 이상의 고급육만을 브랜드로 유통해 맛과 풍미가 좋은 최고의 프리미엄 한우로 인기를 끌고 있다.과학적 사양 관리시스템, 출하관리시스템, 안전 유통시스템 등이 일반 한우와 차별화된 ‘시스템 프리미엄 한우’다. 또 소비자들이 믿을 수 있고, 안전한 한우 관리를 위해 생산이력제를 도입했고 지리적표시제 등록·HACCP(위해요소중점관리시스템)을 인증받았다.특히 늘푸름 홍천한우 브랜드는 정육식당 프랜차이즈사업으로 사업영역이 확대되고 있다.늘푸름홍천한우플라자는 홍천군 지정 향토 음식점 1호에 선정된 곳으로 3~5일 정도 숙성시킨 생고기만 사용한다. 식당 앞에는 모형 소와 실제 송아지, 염소 등이 어우러져 노는 인상적인 모습도 연출하고 있다. 마블링이 퍼져 있는 한우고기를 살짝 익혀 먹으면 씹을수록 육즙이 배어 나온다. 한우고기는 소금에 찍어 먹거나 간장양파 또는 야채절임과 함께 먹어도 맛이 뛰어나다.또 홍천 한우는 우수 품질은 전국에서 인정받고 있다. 올해 4월 홍천의 명품 브랜드 ‘홍천 늘푸름한우’는 제14회 대한민국 국가브랜드 대상 한우 부문 대상에 선정되며 전국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았다. 이번 한우 부문 수상으로 홍천 늘푸름한우는 10년 연속, 그리고 총 11회 수상의 쾌거를 달성했다.홍천군 등은 지속적인 한우 개량과 품질 고급화로 ‘홍천늘푸름한우’ 브랜드 가치를 향상시켜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육성할 방침이다.■평창 대관령한우평창영월정선축협이 대관령에서 직영하는 축협대관령한우타운은 늘 한우를 찾는 손님으로 가득하다. 숯불로 뜨겁게 달궈진 불판 위에 평창 대관령한우를 올려 적당히 구워 입에 한 점 넣으면 입안 가득 육즙이 터지면서 뒤이어 오는 고소한 지방 맛이 풍미를 더한다. 한우의 맛이 달라야 얼마나 다를까? 미묘하게도 차이가 있다.비단 한우뿐이랴. 과일, 야채 농산물까지 평창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이 맛나다.그 첫 번째 이유는 지리적, 자연적 특징 때문이다. 사람은 물론 동식물 생육의 최적 조건을 갖췄다는 HAPPY700 평창을 중심으로 고원에서 자란 평창 대관령 한우는 단단하고 풍미가 좋다.두 번째 맛의 비결은 탁월한 품질이다. 평창·영월·정선 3개 군의 산간 고원지대의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와 청정수로 사육된다. 전체 226개소의 브랜드회원 농가에서 1만 9,000여 두의 소가 생산에서부터 유통까지 전 단계에 걸쳐 전문적인 시스템을 도입,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특히 2013년 ‘한우 품질 관리 및 개선을 위한 시스템 및 방법’과 ‘소의 육량 및 마블링을 증가시켜 기능성 한우로 사양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특허를 받은 품질관리시스템으로 특별한 프리미엄 브랜드육을 생산하고 있다. 2021년과 2022년에는 1톤 넘는 슈퍼한우를 출하했고, 평균 출하 성적 또한 2022년 기준 1등급 이상 출현율 95.97%, 1++ 등급 출현율 42.44%로 전국 평균보다 상당히 높다.세 번째 맛의 비결은 안전성이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모든 소에 대해 무항생제 인증을 받았다. 2003년 전국 최초 한우 부문 소비자 리콜시스템 도입, 같은 해 전국 최초 한우 안심 확인스템 실시, 2014년 대한민국 최초 안전관리 통합인증 획득 등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식자재에 대한 안전성을 높였다. 안전한 축산물을 생산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소비자시민모임으로부터 19년 연속 우수축산물로 인증받았다. 1997년 일본 수출, 2016년 홍콩·마카오 수출, 2018 동계올림픽 공식 한우 서포터로 선정되는 등 평창대관령한우는 한우 세계화에도 앞장서고 있다.한국지방신문협회 강원일보 유학렬·조상원·하위윤기자
부드러운 껍질 속 탱글한 알맹이 …입 안 가득 ‘노란 행복’
담백한 맛에 톡톡 터지는 식감으로 사랑받는 여름철 별미인 옥수수, 특히 찰옥수수는 감자와 함께 강원특별자치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작물이다.통계청 농작물생산조사에 따르면 2021년 강원지역 옥수수 생산면적과 생산량은 각각 5,502㏊, 3만1,031톤으로 전국(1만6,145㏊, 9만5,141톤)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옥수수는 벼, 밀과 함께 세계 3대 식량작물이다. 쌀이 부족하던 1960~1970년대 강원도 산촌에서는 보릿고개를 넘어 벼가 익는 가을이 되기 전까지 감자와 더불어 옥수수가 허기진 배를 채우는 주식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간식으로 더 친숙하다.옥시기, 강냉이 등으로도 불리는 강원도 옥수수는 맑은 물과 깨끗한 환경, 그리고 큰 일교차가 어우러져 달콤하면서도 쫀득한 것이 특징이다.옥수수의 경우 수확한 후에는 당분이 전분으로 변하는 속도가 빨라 시간이 지날수록 당도가 떨어진다.산지에서 먹는 옥수수의 맛이 가장 좋은 이유다.찰옥수수는 삶거나 쪄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옥수수범벅(강냉이범벅), 올챙이 국수(올창묵)와 같은 요리로도 즐길 수 있다.어렸을 적 할머니 집에 가면 껍질을 묶은 옥수수가 처마 밑에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지금은 보기 드물지만 여름철 툇마루에 앉아 먹던 옥수수의 맛과 함께 떠오르는 정경이다.올여름, 동심으로 돌아가 ‘옥수수 하모니카’ 한번 불어 보면 어떨까?■홍천 찰옥수수=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여름철 대표간식 홍천 찰옥수수는 이달부터 본격 출하되고 있다. 홍천의 큰 일교차, 기름진 토질, 적당한 해발고도 등이 어우러지며 옥수수의 맛이 쫀득하고 부드럽다. 홍천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고 강수량과 일조 시간이 옥수수 생육에 적합하다. 덕분에 홍천 찰옥수수는 단맛이 풍부하고 껍질이 얇아 씹는 맛이 부드럽다. 알갱이가 단단해 그 모양대로 쏙쏙 빠져 수월하게 먹을 수 있다.실제 홍천은 사양토와 양토가 전체 밭 토양의 95.8%를 차지하고 있어 배수나 통기성이 좋다. 재배지(밭)의 경사가 대부분 7~15% 정도로 물 빠짐이 좋기 때문에 고품질의 찰옥수수 생산을 위한 조건도 우수하다. 찰옥수수가 재배되는 시기(4~10월)의 일교차(평균 12.1도)가 인근 지역이나 타 주산지보다 상대적으로 커 탄수화물의 함량 역시 높다.홍천 찰옥수수가 특별히 맛있는 이유는 미백2호, 미흑, 흑점2호, 기능성 찰옥수수 등 우수한 종자에 있다.홍천 찰옥수수는 2006년 전국 옥수수 중에서는 처음으로 농산물 지리적표시 등록을 마쳤다. 특히 대표 웰빙 농산물로 주목받으며 지역 대표 축제로도 육성되고 있다. 홍천군과 홍천문화재단은 28일부터 30일까지 홍천종합운동장 주차장에서 ‘홍천찰옥수수축제’를 진행한다. 주요 행사로 홍천 찰옥수수 판매, 체험행사, 이벤트, 공연 등이 준비돼 있다.지난해 3년 만에 대면 행사로 치러진 가운데 총 4만명이 방문했고 축제를 위해 준비한 찰옥수수 17만개가 모두 완판되기도 했다. 축제에 주민들은 물론 외지 관광객이 대거 찾아오며 코로나19 영향으로 움츠러들었던 지역경기 회복에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정선 찰옥수수=정선 찰옥수수는 정선지역의 독특한 토양과 월등한 일조 시간, 그리고 해발 300~600m의 고랭지라는 점 등 지리적 특성으로 다른 지역의 찰옥수수보다 그 맛과 품질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7년 지리적 표시제 제37호로 지정됐다.정선 찰옥수수는 척박한 토양을 이겨내며 자라나 껍질이 얇고 달콤하면서도 쫀득한 맛이 일품이다. 지역 주민들의 여름철 대표 간식에서 이제는 전 국민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각 지역별 작목반 단위의 엄격한 관리로 재배되는 정선 찰옥수수는 신선도 유지를 위해 새벽 4시부터 오전 9시까지만 수확하며, 수확 후 처리 과정에 따라 맛이 좌우되는 특성 때문에 당일 수확, 당일 배송 등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7월 중순부터 본격 출하되며, 정선5일장이 열리는 정선아리랑시장 등 재래시장과 TV 홈쇼핑, 수도권 대형 유통업체 등에 납품되며, 출향단체와 도민회 직거래로도 상당한 물량이 판매되고 있다.정선지역에서는 찰옥수수를 바로 쪄서 먹는 방식 이외에도 잘 말렸다가 가루로 만들어 다양한 음식의 재료로도 활용한다.껍질을 벗기지 않은 찰옥수수를 맷돌에 갈아 콩, 감자 등 잡곡을 함께 넣어 강냉이 밥을 만들기도 하고, 엿기름 가루와 섞어 강냉이 엿을 맛들기도 한다.또 강냉이 범벅과 강냉이 죽, 강냉이 시루떡, 강냉이 인절미 등 쌀이 귀했던 옛 산촌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던 다양한 옥수수 음식이 이제는 추억의 음식, 별미로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인제 옥수수=맑은 물과 깨끗한 환경의 백두대간에서 생산되는 인제 옥수수는 맛도 좋고 영양도 가득해 소비자들이 믿고 사는 ‘청정 농산물’이다.설악산을 비롯해 전체 면적 80%가 산으로 둘러싸인 인제는 주변에 사시사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농부들은 계곡과 계곡 사이에서 옥수수를 재배한다. 인제에서는 1,000여개 농가가 278㏊에서 연간 2,272톤의 옥수수를 생산하고 있다.인제 옥수수는 무더운 낮과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로 선선한 여름밤의 기온을 버텨내며 당도를 높여 간다. 쫀득쫀득한 찰기와 고소한 맛까지 갖춰 한번 입을 대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도중에 손을 떼기 어렵다.이삭 크기가 고르고 알맹이를 둘러싼 껍질이 얇아 고소한 옥수수 본연의 맛을 지니고 있다.영양학적으로 옥수수는 토코페롤이라는 비타민E 성분이 풍부해 눈에 좋고 루테인 성분은 항산화 기능을 해 우리 몸의 유해산소를 제거, 노화 방지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옥수수를 둘러싸고 있는 옥수수 수염은 말려서 차로 끓여 물 대신 마시기도 한다.인제에서도 대표적인 옥수수 산지인 남면에서 수십년째 옥수수 농사를 짓고 있는 최종학(82)·홍옥자(78)씨 부부는 7월이면 정성스럽게 재배한 옥수수를 수확해 소비자들에게 선보인다. 이 부부는 “옥수수 농사에 알맞은 땅에 욕심 부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키워내다 보니 맛있다며 단골이 제법 생겼다”며 “맛있게 먹어주면 그걸로 족하다”고 소탈하게 웃었다.
진도 앞바다의 바람과 파도가 만든 쫄깃·향긋함
“진도 전복의 쫄깃한 식감과 풍미는 진도 앞바다의 풍파(風波)가 좌우합니다.”김종석(62) 진도군 전복협회 회장이 40년 전부터 이어온 김 양식을 뒤로하고 전복 생산을 택한 건 이유가 있다. 전복 양식 15년 차인 김 회장이 키워낸 전복을 맛본 손님은 지금까지 5만명이 넘는다. 온라인 직접 거래를 시작한 6년 전부터 빠짐없이 그를 찾는 단골도 즐비하다.진도 전복은 완도산에 견줄 만한 매력이 있다고 김 회장은 자부한다. 육질이 좋아 씹는 맛이 일품이다. 빠른 유속(流速)과 밀식하지 않는 생육 환경이 진도 전복의 품질을 완성한다.진도 전복 어가들은 치패를 키워낼 때부터 품질 관리가 철저하다. 양식장에 빽빽하게 치패를 넣지 않고 여유롭게 키워내기 때문에 처음 3㎝였던 전복은 1년 만에 6~8㎝ 길이로 성장한다. 출하 시기는 2~3년 주기로, 딱 먹기 좋은 10~14㎝, 200g 크기로 길러진다.‘바다의 산삼’이라 불리는 전복에게는 서남해안의 청정해역이 최적의 생육 환경이다. ‘울돌목’으로 대표되는 진도 앞바다의 빠른 물살은 유해 물질이 해역에 머물 틈을 주지 않는다. 껍데기에 노폐물이 붙지 않는 덕분에 깨끗하고 싱싱한 전복을 거둘 수 있다. 진도 바다는 여름철 적조 발생이 적은 편이라 전복 폐사의 위험이 낮다.진도 전복은 축구장(7140㎡) 1132개 면적인 808.6㏊에서 생산되고 있다. 전복 성패 생산 면적은 785㏊이며, 종자는 23.6㏊ 규모로 키우고 있다.진도에서는 459 어가가 전복 생산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220가구가 성패를 키워내고, 239가구는 종자를 생산하고 있다.진도에서는 한 해 5,303톤의 전복(성패 4,121톤·종자 1,182톤)이 출하된다. 진도 전복 어가들의 연 매출은 1,985억원(성패 1,442억원·종자 543억원)으로, 가구당 4억원 넘는 매출액을 올리는 셈이다.‘억대’ 수입의 꿈을 좇아 진도행을 택하는 귀어도 잇따르고 있다. 진도군은 지난해 전복을 생산하는 귀어인 2가구에 귀어를 위한 창업자금과 주택구입 자금을 지원했다.진도 전복의 위상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지난해 4월 진도 전복은 친환경 수산물 국제 인증인 ASC(Aquaculture Stewardship Council) 국제 인증을 받았다. 진도 전복의 국제 인증 성사까지는 진도군의 노력이 컸다. ASC 인증은 환경 관리부터 노동자의 권리와 안전까지 보증해야 하는 등 인증 절차가 까다롭고 비용도 상당하다. 진도군은 지난 2019년부터 친환경 수산물 생산지로 발돋움하기 위해 인증을 위한 교육, 상담, 심사 지원 등을 추진해왔다.ASC 국제 인증은 수출 경쟁력을 얻는 데 보탬이 되고 전복 양식 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전복 ASC 인증을 받은 진도군 군내면 전복 양식섬 일원은 전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양식장이 적어 바다가 깨끗하고, 냉수대가 조성돼 적조 피해도 발생하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수출 단지 구축 목적으로 조성된 전복섬 영어조합법인은 71 어가로 구성돼 연간 200억원 이상 소득을 올리고 있는 진도군 전복양식단지 중 한 곳이다.고단백 저지방 식품으로 꼽히는 전복은 각종 필수 아미노산과 비타민, 미네랄 등 영양소가 풍부해 기력 회복에 좋다. 지역에 따라 ‘게우’라고도 불리는 전복의 내장도 영양분이 차고 넘친다.예로부터 전복은 한방에서 약으로 쓰여 왔다. 궁중 요리책인 진연의궤(進宴儀軌)나 진작의궤(進爵儀軌),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에 갖가지 전복요리가 등장할 정도로 귀한 식재료로 꼽힌다. 한방 부문에서 전복은 해열, 이뇨 작용, 방광염 개선 등에 효능이 있으며, 간장 기능의 회복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에 열이 많거나 입과 목이 자주 마르는 사람, 자주 어지럽고 목덜미가 당기는 사람, 눈이 침침하고 충혈 되는 사람이 단골로 찾는다.■진도 전복 어디까지 먹어봤니진도 청정해역에서 미역과 다시마만 먹고 자란 전복은 ‘조개류의 황제’로 대접받는다. ‘약처럼 먹는’ 전복을 생으로 먹을 때는 손질이 중요하다. 전복 표면을 솔로 문질러 깨끗이 씻은 뒤 한 손으로는 전복 껍데기를 잡고 한 손으로는 숟가락을 뒤집어 얇은 쪽부터 전복 살을 밀어내면 된다. 껍데기에서 전복 살이 떨어져 나올 때 내장을 뗀다. 전복 살에서 이빨을 제거하면 손질이 끝난다. 떼어낸 내장은 맛소금을 섞은 참기름에 찍어 먹으면 싱싱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전복죽을 끓일 때 내장을 참기름에 볶아서 넣으면 죽이 초록색을 띠며 풍미가 깊어진다.전복은 주로 얇게 어슷썰어 횟감으로 먹는다. 끓는 물에 데쳐 곱게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좋다.진도에서는 철분이 많이 들어간 톳을 넣은 ‘토시오 전복장’을 만들어 먹는다. 방부제와 화학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 안전성도 겸비했다. 토시오 전복장은 미리 담가놓지 않고 주문을 받는 동시에 살아있는 전복을 사용해 만든다. 숙성 기간을 맞춰 입맛에 따라 전복장을 즐기는 재미가 있다. 전복장을 건져 먹은 뒤 남은 간장은 ‘숨은 요리 공신’으로 거듭난다. 전복장 간장은 메추리알 장조림, 깻잎 장아찌, 간장 달걀밥 등과 최고의 궁합을 자랑한다.진도 전복과 토시오 전복장은 진도의 청정 농수산물을 한 자리에 모은 브랜드 쇼핑몰 ‘진도아리랑몰’(jindoarirangmall.com)에서 만날 수 있다.‘바다의 선물’ 전복은 돼지고기와도 남다른 조합을 자랑한다.지난 2021년 전남도·전남어촌특화지원센터가 개최한 비대면 요리 영상 공모전 ‘바이씨(buysea.co.kr)와 함께라면 나도 요리사’에서는 진도 신기 전복으로 만든 ‘전복 LA갈비찜’이 대상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는 전국의 바다 요리 고수들이 ‘버터 전복 떡볶이’ ‘칠리 전복’ ‘전복 이유식’ ‘묵은지 전복 김치찌개’ ‘전복 미역국’ 등 다양한 조리법을 공개했다.올해 3월부터는 매주 토·일요일 진도 울돌목 주말 장터에서 전복 해물라면 등 다양한 전복 먹거리를 선보이고 있다.울돌목 주말 장터는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 광장에서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린다. 지난해 1만1270명이 찾는 주말 장터는 다채로운 공연과 체험을 마련해 관광객을 맞고 있다.광주일보 백희준‧이종수 기자 bhj@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