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 불행이나 불운, 굴욕, 실패를 보고 노골적으로 축하하거나 자신이 복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측은해하고 동정하거나 자신이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때로는 슬픈 척 위로하면서 내심 고소해하거나 은밀히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를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증후군’이라고 하며, 남의 불행이 곧 나의 기쁨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면, 걸으면서 휴대전화를 보다가 가판대에 부딪치거나 넘어질 뻔한 광경을 보았을 때처럼 남의 우스꽝스러운 실수나 예상치 못한 사고에 재미를 느끼고, 시합에서 경쟁자의 짜릿한 실패나 타인과의 비교 우위에 환호성을 지르고, 나쁜 인간이 벌을 받으면 정의감이 실현된 자업자득으로 여기며, 팔불출과 같이 잘난 척하던 우월감이 실추되면 쌤통이라고 느낀다. 거만하게 굴거나 인색한 부자가 망했을 때, 남을 괴롭히던 사람이 뜻밖의 반격을 당했을 때 또는 집단의 결속과 유지에 해가 되는 사람을 배제하는 데에도 이런 감정이 적절히 활용된다. 밉상으로 여기던 사람의 발언에 누군가 속 시원한 반박을 했을 때 ‘사이다’ 발언이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감정이 생기는 생리적 원인은 뇌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이나 행복, 애착, 안정 등을 유발하는 이 호르몬은 여성 호르몬에 의해서 효과가 증폭돼 포용과 친화력을 촉진하기도 하지만 시기와 질투심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는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심리가 있다는 사실에 조금 거북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이 감정을 나쁘고 음흉한 것으로 생각한다. 공감과는 반대로 생각되어 찝찝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인과응보로 여기거나 어느 정도 유익하다고 믿어 고소해하는 경우도 있다. 악의가 아니라 도덕적 균형을 유지하려는 욕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잘난 척하는 사람의 실패를 계기로 열등감이나 시기심이 줄어들고 내집단의 결속과 유대감을 도모할 수 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게 하며 인생의 부조리함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친구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고 그의 상실감에 안도감이 밀려든다고 나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끔찍한 불행을 제물로 기꺼이 바치기도 한다. 간혹 남의 불운에 흐뭇해하는 마음이 있음을 솔직히 자인할 때 그 저변에 있는 더 괴로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남의 불행을 즐기는 마음은 짓궂고 고약하며 비열하지만 우리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결점을 인정하고 용감히 맞서야 한다. 실수나 사고는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으므로 나를 대신해 상대가 불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여긴다면 상대에게 고맙거나 미안한 느낌마저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남의 불행에 대비돼 자신의 행복을 느끼며 감사하는 경우는 있지만 남의 불행을 의도적으로 바라거나 즐기지는 않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도 나약해지고 절망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자신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경우는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