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스안내양’이라는 직업이 있었다. ‘버스 여차장’이 정식 표현이지만 우리에게는 ‘버스 안내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친근하고 익숙한 추억 속의 이름이다.
손으로 글을 쓰는 필경사(筆耕士)가 PC·워드프로세서 등 문서 작성 도구나 프로그램의 등장으로 점차 사라진 것처럼, 버스안내양도 ‘시민자율버스’ 의 출현이라는 운송 시스템의 변화 속에서 자연스레 자취를 감춘 직업군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생겨나기를 반복하지만 1960~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들은 아련한 추억 속 애틋함으로 남아있는 우리들의 언니였고, 누이였다. 넉넉치 않던 시절에 부잣집 식모나 여공처럼 큰 기술없이도 당장 돈을 벌 수 있었던, 하지만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받던 그 시절 여성노동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에 버스안내양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이다. 당시 경성부(서울특별시)는 서울에 전차는 물론 택시나 인력거 등 교통체계가 어느정도 갖춰져 있지만 전차를 이용할 수 없는 골목이 많은데다 택시와 인력거를 이용하는 금액이 비쌌기 때문에 대중교통 체계의 도입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량 10대를 도입하면서 운전사와 함께 여차장을 채용하게 되는데, 그들을 ‘뻐스걸(버스걸)’이라고 불렀다. 버스 안내양의 조상 쯤 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저렴한 차비를 받는 승합자동차업을 준비하면서 일본에 주문한 자동차 열대도 도착했고 차장으로 쓸 여자인 ‘버스걸’과 운전수의 채용도 전부 완료됐으므로, 봄날의 꽃빛이 무르녹는 오는 22일(1928년 4월22일)에 영업을 개시하게 되었다.(조선일보 1928년 4월19일자)”

당시에 버스걸은 양장 유니폼을 차려입은 단아한 모습으로 인기를 끌면서, 1순위 신부 후보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처음 등장한 버스안내양은 광복과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라진다. 이후에는 버스걸의 자리를 남자 차장들이 대신하게 되는데 사람들에게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버스안내양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61년 정부가 ‘여차장제’를 도입하면서 부터다. 당시 정부는 여객안내는 서비스업이므로 선진국에서는 모두 여성이 담당하고 있고, 여성들의 유휴노동력을 활용해 산업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이유 등을 근거로 들었다. 운수사업자들이 승객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영역까지 정부가 관여해 “감 놔라 대추 놔라”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는 했지만 정부주도가 횡행하던 그때는 그게 가능했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지만 1961년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된 버스안내양으로의 교체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며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성역할에 대한 단순한 구분에서 시작된 교체작업으로 인해 이런 저런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1966년에는 버스안내양들이 손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데다 나이어린 소녀들이 힘든 업무에 내몰리고 있다면서 여차장제을 폐지해야 한다는 운수업자들이 건의가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다음 정류장은 명동입구 입니다”라며 내릴 곳을 알려주고, “더 내리실분 안 계세요?”라는 멘트와 함께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며 “내리실 분 안계시면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안내양의 모습은 1990년대 TV에 방영된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이영자와 홍진경이 웃음의 소재로 활용,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버스안내양의 실제 삶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낮은 임금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자정이 넘어야 일이 끝나는, 하루 18시간 가까운 노동은 기본이었다. 때때로 취객들의 시비를 받아줘야 했고, 만원버스 안에서 늘상 성희롱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또 회수권 10장을 교묘하게 잘라 11장으로 만든 녀석들을 걸러내야 했고, 달리는 버스 난간에 매달려 두팔로 미처 버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승객들을 밀어넣는, 목숨을 담보로 한 아찔한 상황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양 주머니 가득 짤랑거리는 동전으로 정확하게 거스름돈을 전달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버스안내양들에게는 일상다반사로 겪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들을 동료로 보기 보다는 차비를 빼돌리는 도둑으로 취급하는 회사의 시선이 그것이었다. 사실 항상 현금을 소지할 수 밖에 없는데다, 박봉에 시달리는 형편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이른바 ‘삥땅’은 충분히 가능한 구조이기는 했다. 하지만 사측에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구실로 안내양들의 몸수색을 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심지어 알몸수색까지 당하는 인권유린이 지속적으로 자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급기야 1978년(동아일보 10월20일자)에는 한 버스안내양이 지나친 몸수색에 항의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버스안내양은 1982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고, 1984년에 다음 버스 정류장 정보를 알려주는 하차지점 안내방송 시작과 함꼐 버스 벨, 버스 자동문 설치로 자리를 잃게된다. 1989년에 이르러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조의 6항이 삭제되면서 버스안내양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제는 농촌지역에서 노인 등 교통약자들의 승하차를 돕는 역할을 하는 버스안내양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