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Diaspora·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한(恨)을 담고 있다.
1960~1980년대 탄광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석탄산업 합리화 이후 빠르게 흩어졌다.
창간 80주년을 맞아 ‘첨단산업+석탄문화 세계유산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강원일보는 폐광과 지역소멸 위기 속에 탄광촌 사람들만의 애환이 담긴 삶을 소개하고 현대사에서 석탄산업이 갖는 의미를 돌아보는 ‘탄광 디아스포라’를 연재한다.

태백 가장 번화가에 자리잡은 황지자유시장에는 유별난 특징이 있다.
부산 감자 옹심이, 경북기름집, 서울기름집, 제천닭집, 상동집, 봉화상회, 정선식당, 임계해장국, 삼척상회, 하장상회, 묵호상회, 안동한복…상호에 유독 지명(地名)이 많다. 전국 곳곳에서 일자리를 찾아 탄광으로 사람이 몰려들던 화양연화(花樣年華·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의 흔적이다.
지난 4일 오후 2시 시장통의 ‘부산 감자 옹심이’ , 점심 시간을 훌쩍 지났지만 손님들이 1층의 모든 테이블을 메우고 있었다. 주말, 휴가철에는 점심시간에만 100 테이블 이상의 손님이 몰리고 대기줄이 1시간씩 늘어서는 이름난 전국구 맛집이다.
식당을 운영하는 ‘부산댁’ 이무자(83)씨는 부산 국제시장 상인의 막내딸, 경상도 사람이었다. 1964년 남편이 태백의 국도 공사현장에 감독관으로 취업하며 태백으로 이주했다. 당시 탄광이 성업하며 태백은 산비탈, 하천가 할 것 없이 건물이 세워졌고 그만큼 많은 도로와 교량이 필요했다. 개발붐 속에 이씨 부부도 일자리를 찾아왔다. 국도 공사가 끝난 후 남편은 장성광업소에서 광부로 일하며 정착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이씨는 시장에 한복가게를 차렸고 자연스럽게 ‘부산집’으로 불렸다. 이씨는 “처음 태백에 왔을 때 거리가 온통 검은 탄이었다. 마누라 없이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라며 “그래도 시장이 항상 사람들로 넘쳐났다. 옷도 아주 잘 팔렸다”고 회상했다.
이씨가 담근 부산식 젓갈 김치는 시장 동료들 사이에서 큰 인기였다. 마침 한복집을 하기엔 눈도 침침해지고 음식 장사 해보라는 주변의 성화에 20년 전 ‘부산 옹심이 식당’을 차렸다.

강원도 향토 음식 ‘옹심이’와 ‘부산’의 조합이 묘하다. 옹심이와 감자전 등 메인은 강원도식으로, 김치나 밑반찬은 남해산 젓갈을 넣어 부산식으로 만든다.
태백에 산 세월이 부산에서 산 세월의 곱절을 넘지만, 여전히 ‘부산댁’인 이씨의 정체성이 담겼다. 아니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왔던 태백의 정체성이 담겼다.
대표 이무자 씨는 “시장통에 동네 이름 간판은 다 아주 오래된 집이다. 탄광이 잘될 때 시장에 사람이 모이면서 다들 자기가 온 고향을 따서 불렀다”면서 “그때는 시장바닥이 온통 검은 탄이라 빨래도 못 내놓을 정도였지만 사람과 돈이 넘치던 시절”이라고 읊조렸다.
함께 장사를 하는 막내 딸 김현주(45)씨는 “부산에서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재료를 아끼지 않는다. 부산과 강원도의 독특한 조합으로 특허도 준비 중”이라며 “손님들이 예전엔 동네 사람들이었다면 이제는 관광객들이다. 태백이 시원해 여름 관광객이 많다. 앞으로 관광과 첨단산업을 개발하면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 탄광촌 흥망의 최일선 현장이었던 시장통은 지난해 장성광업소 폐광 이후 걱정이 가득하다.
시장 중심에 자리잡은 ‘경북기름집’은 올해로 80년을 맞았다. 첫 주인이 경북 안동 출신으로 영주 사람에게 가게를 물려줬다.
삼대째 기름집을 운영하고 있는 장영희(여·78)씨는 “처음 태백에 왔을때 인구가 13만이었는데 지금은 4만도 안된다. 한 사람이라도 붙잡으려 노력은 하지만 쉽지않다”며 “제천~삼척 고속도로에 기대를 많이 거는데 그래도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또 바로 옆 제천닭집은 충북에서 왔다. 태백이 제2의 고향이라는 사장 송연희(여·61)씨 “최근 뉴스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가 태백이라는 보도를 봤다. 노인밖에 살지 않는 도시가 됐다”며 “태백은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문화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해 더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