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여정이었다. 남큐슈의 가고시마(鹿兒島)는 일본 열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한낱 변방으로만 여겨왔다. 어쩌면, 일본하면 떠오르는 ‘도쿄·교토·오사카’ 등과는 달리 그 이름조차 생소하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이리라. 하나, 그곳에는 오랜 세월 화석처럼 굳어버린 한·일간의 역사와 신화적 편린들이 골골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로 인문학 탐방에 나선 것은 지난 1.21-25간의 4박 5일이었고, 참여자는 전 지자체장, 언론인, 기업임원, 화백, 시인, 해설사, 학생, 그리고 재미 및 재일교포까지 분야별로, 또 지역적으로 아주 다양하였다.
현장 강의는 홍인희 前 강원대 및 공주사대 초빙교수가 맡았는데, 여러 대중인문서 저술과 함께 천여 차례 넘는 강연, 방송, 국내외 인문학 탐방 등을 통해 인문학 전령사 역할을 해오고 있다는 평을 받는 인문 작가이기도 하다.
첫 발길이 닿은 곳은 기리시마연산(霧島連山), 일본 건국과 관련해 주장하는 ‘천손강림신화’의 현장이었다. 일본의 대표 고대사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 내용을 들어 파노라마처럼 펼치는 홍교수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보니 이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단군의 이야기와 가야의 건국신화를 쏙 빼 닮은 내용이었으며, 특히 그 산봉우리들 중 1,700m의 최고봉이라는 ‘가라쿠니다케’가 한국악(韓國岳)으로 불리는 사실도 쉽사리 이해할 수 있었다.
인근에 위치한 기리시마 신궁은 우리의 환웅격으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니니기노미코토를 기리는 곳으로, 그 후예가 초대 진무천황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지금의 126대까지 하나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만세일계’를 이루어냈다는 내용이 줄거리다. 다분히 허구적 구조라고 이해하면서도, 그들이 조상의 뿌리라고 여기는 신적 존재를 오늘날까지 받드는 습속이 조금은 특별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튿날 일찍부터 찾은 곳은 미야마(美山) 마을이었다. 430여 년 전 있었던 임진왜란 당시 전북 남원성이 왜군들에 의해 함락되면서 도자기·인쇄·건축 기술 등을 가진 조선백성이 끌려왔고 이중 도공(陶工) 중심의 47명 정도가 그 일대에 정착, 일본이 자랑하는 ‘싸스마야끼’(가고시마 도자기)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들이 정유재란을 일러 “화려한 문화적 외출” 또는 ‘도자기전쟁’이라고 한 이유라는 것이 홍교수의 평가였다.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오늘에까지 조선의 혈통을 유지하여, 초대부터 지금의 15대에 이르도록 동일한 한국식 이름을 잇고 있는 심수관(沈壽官) 가문이었으며, 그곳 전시관 한편에 자리한 ‘히바카리’는 당시 빚어진 질박한 조선식 도자기로 우리 일행의 먹먹한 심정과 애틋한 눈길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또 하나, 단순 관광이었다면 존재조차 알 수 없었을 옥산궁(玉山宮)은 그 옛날 납치되어 온 조선인들이 망향의 설움을 달래던 단군신사였다. 낯선 곳에서 고난의 삶을 지탱해주던 정신적 버팀목이 바로 단군이었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감정이 이입되었다.
날을 달리해 방문한 사무라이 집단거주지에서는 일본의 오랜 칼과 전쟁의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높은 담벼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이며, 집안 정원 내의 칼 가는 숫돌로 보이는 대형 돌덩이는 또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이러한 사무라이의 잔인성은 다음 코스인 치란 특공평화회관에서 여실히 목도되었다. 치란은 1945년 태평양전쟁 당시, 항공기를 이용한 자살만행을 저지른 저 악명 높은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이 훈련받고 발진했던 야만의 현장이다. 당시 식민지인으로 참전했던 수십의 조선 청년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회관 내에는 비행기에 오르기 몇 시간 전 젊은 대원들이 남긴 유서, 편지, 사진 등 죽음의 흔적들이 그득하지만, 무엇을 꺼리는 것인지 사진촬영은 엄격 금지다.
밖의 분위기도 온통 위령비·석등이 즐비해 음산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때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른바 ‘치란 아리랑비’, 카미카제 특공대로 출정해 산화한 24살의 조선청년 탁경현을 기리는 자그만 화강암인데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아리랑 노래 소리는/ 아득히 멀어지고/ 내 어머니 나라에/ 그리움만 남겨놓은 채/ 하염없이 흩어지는/ 꽃잎 꽃잎들”
모든 일정 중 일행들을 가장 우울하게 했던 그곳을 탐방하며, 줄곧 떠나지 않는 의문이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 왜 평화회관이라고 표방하면서도 전범국가로서의 사과문 하나 없는가? 또 하나, 과연 특공과 평화라는 개념은 서로 어울리는 용어인가?
마지막으로 찾은 장소는 가고시마 출신이자 일본에서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대형 동상과 묘가 자리한 다가야마 공원이었다. 그곳에서 홍교수는 1905년 일본 해군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킨 주인공이었던 도고가 얼마나 이순신 장군을 흠모했으며 한산도 대첩의 학익진에 숨겨진 ‘화력제곱비의 원리’를 어찌 원용하였는지에 대해 야외 칠판에 직접 써가며 열정적으로 설파하였고, 일행은 이를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경청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성웅인 충무공을 다시금 숭모하는 마음과 더불어, 일본 측이 장군의 탁월한 전법을 끌어다 러일전쟁에서 승전하고 종당에는 이것이 한일합방으로 이어졌던 엄연한 사실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기묘한 역사의 아이러니와 함께 착잡함을 떨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이제, 가고시마의 탐방 여정을 촘촘히 떠올려 보자니, 이케다 호숫가의 흐드러진 유채꽃, 활화산인 사쿠라지마와 함께, 단군신화·이순신·심수관·탁경현 등이 머리를 스친다. 아마도 그곳에 깃든 우리 역사와 신화적 파편들을 찾아 나서고자 했던 홍교수의 의도가 이것이었나 보다.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말하길, “머리에 너무 많은 것을 넣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의미 있는 조크를 날리자 일행이 공감의 박수를 쳤다. 불과 1시간 40여분 만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끝으로, 탐방단의 최연장자인 한상철님이 줄곧 보여주신 학문적 열정, 그리고 유머와 건강은 모든 이의 귀감이자 나의 노후관리에도 이정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