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확대경]적대정치, 필연인가

이덕수 은퇴디자인연구소장·한림대 객원교수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의 그의 책 넥서스에서 민주주의의 전제로 소통도구와 자정장치를 강조했다. 아테네와 로마는 도시국가 시절에 잘 작동하던 소통도구가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기능을 못하게 되자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졌고, 나치즘, 파시즘과 푸틴의 독재정치 등은 자정장치가 없거나 작동하지 않기에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번에 우리나라 국회가 계엄해제요구를 의결하고 헌재가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것은 자정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보다는 적대정치일 것이다. 일찍이 조국사태 때 문재인 대통령은 그에게 신세 진 것이 크다고 해 국민분열을 부채질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정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으로 피아구분만 신경 쓴다. 우리가 이렇게 적대정치에 빠져 있고 또 많은 국민이 어느 한쪽 편을 드는 데는 정치 리더들 책임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상대적으로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때 좋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우리 모두의 염원이 가난을 벗어나자는 것과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두 열심히 일했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웬만한 건 참을 수 있었다. 단임제는 그에 적합한 것이었고 정치인들도 여야를 막론하고 탐욕보다는 사명이 앞섰다는 것이 지금과는 달랐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성사시킨 몇 안되는 나라이면서 세계 6위 수출국이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실현한 결과 오히려 국민들은 대의보다 각자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누구나 인간답게 살고 싶고 정치에도 자신의 의견을 내고 싶어 한다. 나라가 세계 몇위라는 거 보다는 내게 혜택이 있느냐가 중요해졌다. 그러러면 경제는 기존의 대기업 위주 모델에 변화가 있어야 하고 사회는 개혁과 통합이 필요하다.

현실과의 갭이 클 수밖에 없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포퓰리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퓰리즘은 소수 권력엘리트와 권력을 빼앗긴 다수를 전제로 피아구분하고 상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대중영합주의, 인기영합주의를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참된 진리, 윤리와 보편적 아름다움은 가짜이거나 찾기 어렵고, 하기에 오히려 각자의 의견과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포퓰리즘보다 더 넓은 개념이지만 이 둘은 이 시대가 더 이상 답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한계상황에서 비롯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19세기 시민사회 형성의 기본원리가 모더니즘이었다. 신분사회가 붕괴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면서 인류는 이성과 보편적 가치체계로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더 좋은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바탕이 시민사회와 시장원리였는데 이런 방법으로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게 곧 분명해졌다. 사회주의도 답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더니즘과 현실의 갭에서 출발한 포스트모더니즘, 포퓰리즘은 오늘날 인류의 미래를 시험하고 있는 글로벌 현상이다. 브렉시트, 트럼피즘, 12·3계엄 등이 여기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남북문제와 대일문제 등이 있어서 이런 문제에 노출이 더 커지기 쉽다. 사회통합, 개혁에는 마음도 없으면서 탐욕과 편가르기에만 몰두하는 정치권이 원망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퓰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적 현상이다. ‘내가 해결사다’ 하고 깃발 꽂으면 국민은 달려든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는 ‘내차례야’ 하고 누구나 외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여기 맞서려면 지성과 윤리라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해결사라고 속이지 말고 진짜 목숨걸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죽기까지 위로와 격려의 길을 갔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도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다. ‘용기를 내어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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