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정연수의 ‘탄광촌 기행’]대를 잇는 광부, 광부가 꿈인 학생과 학교들

‘첨단산업+석탄문화 세계유산화’
(6)광부가 꿈인 학생과 학교들

태백기계공고 실습실 내부에 ‘나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광부 스카우트 경쟁=1970~1980년대 석탄증산이 시급하던 시절 탄광에서는 숙련 광부 구인에 어려움을 겪었다. 탄광촌에서는 명절 보너스를 탄 뒤 복지가 더 좋은 탄광으로 옮기는 것이 유행일 정도로 광부 인력이 부족했다. 태백시의 영세광업소에는 명절을 보내고 나면 광업소마다 25% 정도의 광부가 돌아오지 않았다. 기계화가 되지 않은 탄광에서는 인력에 의지해 석탄을 생산하고 있었으므로 구인난은 계속되었다. 탄광은 육체노동을 감당할 수 있는 젊은 노동력을 요구했다. 1962년에 조사한 광부의 구성 비율을 보면 39세 이하가 전체의 81%를 차지했으며, 석탄공사 산하 광업소의 생산노동자들만 보았을 땐 40세 이하가 전체의 87%에 달했다.

대도시에는 광부를 소개하는 직업소개서가 등장했으며, 탄광촌 내에서도 광부 소개비가 별도로 책정되었다. 숙련 광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광업소에서 데려오는 ‘광부 스카우트’ 경쟁으로까지 번졌다. 1978년 대한탄광협회에서는 동자부장관과 대한석탄공사 사장 앞으로 민영탄광 광부 스카우트를 중단하고, 고용한 광부를 즉각 원소속 탄광으로 환원할 것을 요구하는 문서를 발송하기도 했다. 인력난이 고질적 문제로 작용하면서, 1991년 정부에서는 외국 광부 수입을 추진하다가 탄광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바 있다.

기계화가 안된 탄광에서 인력으로 채탄하는 광부. 사진=대한석탄공사

■광부가 꿈인 학생, 광부 만드는 학교=1948년 삼척탄광(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의 광부들은 몇 달 동안 월급에서 3%씩 갹출한 돈으로 태백중학교를 설립했다. 광부의 자녀 교육을 위해 광부 스스로 세운 학교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자라나는 우리 산업전사의 자랑”이라고 밝혔다. 사회에서는 그 학생들이 산업전사인 광부가 될 것을 주문한 셈인데, 상당수의 학생은 실제로 광부가 되었다.

외부의 노동력 인력 확보에 한계가 있자, 정부에서는 탄광촌에다 공업계 고등학교를 신설했다. 1951년 태백의 태백기계공고, 삼척의 삼척공고와 도계실업고, 1949년 영월의 영월공고, 1966년 정선의 함백공고에다 광산과를 개설했다. 태백기계공고 정문의 거대한 탑에 새긴 ‘기술인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구호는 학생에게 ‘산업전사’의 자부심을 이어받으며 광부라는 꿈을 키워주었다. 탄광촌에서 ‘우리는 산업전사 보람에 산다’라는 구호가 넘치는 동안, 탄광촌의 고등학교에는 ‘우리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 현수막이 펄럭였다. 이를 통해 광부의 자녀가 자연스럽게 대를 이어 광부가 되었다.

탄광촌의 공업학교로 진학한 대다수 학생은 광부의 아들이었으니, 갱도에서 광부 아버지와 광부 아들이 안전구호를 외치며 지나갔다. 1950년대 모범산업전사로 선정된 광부의 자식들도 대물림하듯 광부가 되었다. 정선의 사북광업소 광부로 일하던 이원갑(사북항쟁의 주역)의 아버지, 삼척의 경동탄광 광부에서 관리자까지 지냈던 이희탁(중앙진폐재활협회 회장)의 아버지 역시 모범산업전사로 선정된 영예를 안은 이들이었다.

탄광촌의 공고 광산과를 통해서도 광부 인력 공급이 부족했다. 1970년대 말에는 일부 탄광에서는 불법임을 알면서도 갱내에 입갱하는 여성 광부 도입을 고려할 정도였다. 이미 삼척 가곡면의 아연광산에서는 입갱하는 여성 광부가 등장한 터였다. 급기야 정부와 탄광업계는 공동 기금을 투자하여 충북 제천에다 한국광산공고를 1980년 개교했다. 채광과, 선광과, 광산토목과, 광산기전과 등 4개과에서 매년 240명을 배출해 탄광과 일반광산으로 공급했다. 한국광산공고는 석탄산업합리화가 시행된 그 이듬해인 1990년인 개교 10년 만에 공립 공업고등학교로 전환됐다.

광부들에게는 ‘아들놈 광부 만들지 않고, 딸년 광부 마누라 만들지 않겠다’는 유행어가 있었다. 그런데도 2대 광부가 흔한 실정이고 보면 광부들의 자녀교육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공업계 학교를 통해 광부 유인에 나선 정부 정책이 성공한 셈이다. 광부가 필요없는 세상이 되자 탄광촌의 공업고등학교에서는 광산과가 폐지되었으며, 이어서 교명까지 모두 변경되었다.

태백기계공고 정문에 세워진 탑, ‘기술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

■강원 최초의 공업학교=강원도에 공업학교가 최초로 설립된 것은 삼척공업학교이다. 삼척공업학교의 설립은 강원도의 석탄산업사를 보여주는 과정이자, 한국 산업화 시기의 교육 변화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전시하의 직업전사 양성’이라는 목적을 선언하면서 1939년 개교한 삼척공립직업학교는 광산과와 토목과를 두었는데, 당시 합격자 80명 명단 전원을 신문 1면에 공개할 정도로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1944년 삼척공립공업학교로 개편하였다가, 1946년 삼척공립공업중학교(현재의 고등학교과정)로 승격되었다. 1947년 남한에 23개의 공업학교가 있었는데, 강원도에서는 삼척공업학교가 유일하다. 1950년에는 삼척공업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63년에는 5년제 학교가 되었다. 당시 5년제 실업고등전문학교로는 전국에 삼척·부산·경기·대전 등 4곳뿐이었다. 그러다가 2년제 공업전문대학을 거쳐 1991년에는 4년제 대학으로 승격했다. 2006년 강원대학교와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니,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의 뿌리는 삼척공업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삼척공업학교는 ‘직업학교-고등학교-5년제 전문학교-2년제 대학-4년제 삼척대학’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생명력도 놀랍다.

탄광 호황기에 태백지역 광부들이 태백중학교를 만들었다면, 폐광기에 삼척지역 주민들은 대학을 설립했다.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삼척시 도계지역이 폐광으로 몰락하자 대체산업의 대안으로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를 설립하고 나섰다. 도계 폐광지역 주민들의 생계를 위해 지원한 예산 1,300억원을 투자하여 2009년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를 설립한 것이다. 도계광업소 폐광을 앞두고 도계주민은 총궐기에 나서는 중이다. 아들까지 광부로 바친 이들에게 사회의 온정이 있기를 기대한다.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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