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발언대]도암댐은 말이 없다

정항교 강원문화유산위원·문학 박사

농경이 주였던 우리 민족에게 젖줄의 근원인 물은 생명의 원천이나 다름이 없다. 대관령과 삽당령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남대천은 강릉시민의 젖줄이자 생명의 원천이다.

남대천은 강릉지방 인물 배출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강릉의 역사를 담은 임영지(臨瀛誌)에는 455년 전 송강 정철이 경포대에 올라 “강문교 다리 너머 대양이 거기로다”라고 읊조릴 때만 해도 남대천 물길은 초당과 강문을 지나 경포로 들어갔다. 이때만 해도 강릉 고을에는 과거에 올라 높은 벼슬을 지낸 인물이 많았는데 자연재해로 물길이 안목으로 바뀌면서 인재가 드물게 배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길이 바뀐 것이야 자연의 힘이라 어쩔 수 없지만 지난날 갓끈을 씻던 맑은 물이 오늘날 발마저 씻을 수 없게 되었다면 이는 분명 인간이 저지른 만행임이 틀림이 없다.

25년 전 남대천 오염 원인이 도암댐 방류 때문이라고도 하고 한편에서는 시민이 버린 하수 때문이란 공방 속에 남대천을 되살리자는 시민운동이 펼쳐졌다. 당시 방류로 인한 피해액만 1,200~1,800억 원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결국 도암댐은 방류를 중단했고 지금까지 물은 흐르지 못하고 있다.

1574년 율곡은 오늘날 대통령 비서관에 해당하는 우부승지로 있을 때 당시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보다 못해 만언(萬言)에 이르는 개혁에 대한 글을 임금에게 올릴 때 이에 대한 방안까지 제시하면서 “재능과 덕을 겸비하고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질 줄 아는 현명한 인물을 조정에 불러들여 일단 일을 맡기되 임금은 권위를 내려놓고 지극 정성으로 묻고 의논한다면 지금같이 혼란한 시국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율곡은 이 같은 수습책을 제시하면서 “만약 이대로 시행하여 3년이 지나도 나라고 부흥하지 않고 백성의 삶이 나아지지 않으면 개혁의 방향을 잘못 제시한 책임과 임금을 속인 죄로 극형도 달게 받겠다”라고 했다.

당시 기고를 통해 도암댐이 남대천으로 흐르고 있을 때 상, 중, 하류로 나누어 오염 정도를 측정한 다음 3년 동안 방류를 중단했다가 측정한 곳에서 다시 측정하여 수질이 개선되었다면 방류로 인한 피해액은 방류한 측에서 강릉시민에게 보상하고, 3년 동안 방류를 중단했음에도 오염 정도가 그대로라면 방류 중단에 따른 피해액은 강릉시민이 보상하면 될 것이라고 제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도암댐은 서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논쟁만 일삼으며 아까운 세월만 보내다 3천만 톤의 물을 머리에 이고도 활용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강릉이 시로 승격한 지 환갑(還甲)을 지나 고희(古稀)를 맞았음에도 아직도 생명의 젖줄을 하늘에 맡기고 있었다니 그저 서글프고 안타깝기만 하다. 절박한 현실 앞에 누구를 탓하며 누구를 원망할 때가 아니다.

시민이 다 같이 어울려 환호하고 경축해야 할 시 승격 70주년 기념행사도 잠정 연기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어려움을 다 같이 이겨내고자 한 조치라 관계기관의 현명한 판단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아쉽게 연기한 행사는 어려움을 극복한 뒤 그동안 고통을 참아가며 물 절약에 동참한 시민을 위해 위안 잔치의 성격을 곁들여 성대하게 치르면 될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더듬어 보더라도 한 마음으로 뭉쳐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했을 경우 이를 극복하지 못한 예는 없었다. 고통이 따르겠지만 비장한 각오로 이 위기는 무조건 이겨내야 한다. 하늘도 이치가 있다면 언제까지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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