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1453년)으로 김종서와 황보인 등 조정의 원로들이 숙청을 당하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의 운명은 소용돌이쳤다. 단종은 왕위에 있었으나 실권은 수양대군에게 있었다.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핵심 요직을 모두 독점하며 사실상 ‘무관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단종의 주변에는 그를 지켜줄 세력이 사실상 전무했다. 둘째 숙부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사사됐고, 단종의 측근들은 계속해서 제거됐다. 결국 1455년(단종 3년) 윤 6월, 견디다 못한 단종은 첫째 숙부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기며 양위 의사를 밝힌다. 수양대군은 겉으로는 울면서 사양하는 척했으나 이내 이를 받아들여 조선 제7대 왕 세조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노산군이 일어나 서니,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 노산군이 손으로 대보(옥새)를 잡아 세조에게 전해 주니, 세조가 더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는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중략)…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받들게 되었다.(세조실록1권, 세조 1년 윤6월 11일)” 이로써 15세의 단종은 삼촌에게 하릴없이 자리를 빼앗긴 채,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상왕이 돼 수강궁(현 창경궁 일대)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같은 세조의 즉위 과정은 명분과 정통성이 결여돼 있었다. 이에 반발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집현전 출신 학자들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종 복위를 은밀히 계획했다. 기회는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열릴 예정인 명나라 사신과의 연회였다.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가 왕의 호위 무사인 ‘별운검(別雲劍·큰 칼을 차고 임금을 옆에서 모시던 무관의 임시 벼슬’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들의 계획은 연회 도중 별운검들이 세조와 그 측근들을 처단하고 상왕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함께 도모하던 김질이 두려움을 느끼고 장인 정창손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며 세조에게 밀고한다. 이를 접한 세조는 성삼문, 박팽년 등 주동자들을 친국(임금이 직접 심문함)하며 잔혹하게 고문한다. 이 과정에서 박팽년은 “성승·유응부·박쟁이 모두 별운검(別雲劍)이 되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어제 연회에 그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세조실록4권, 세조 2년 6월 2일)” 라며 거사 계획을 털어 놓는다. 눈치빠른 한명회가 무사들의 연회장 입장을 막아서면서 단종을 다시 왕좌에 올리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여파는 상왕 단종에게까지 미쳤다. 세조를 중심으로 한 공신 세력들은 단종 복위 운동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단종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단종은 상왕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 보내지게 된다. 세조실록은 유배지의 구체 지명을 상세히 남기지 않았고, 후대에 ‘청령포’ 서사가 기억과 기록으로 덧씌워지며 확장된다. “단종 대왕께서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 해인 병자년(1456)에 영월 청령포에 옮겨 갔을 때는 마침 늦은 봄이었습니다. (중략)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사육신(死六臣)이 꿈에 나타나서 마치 살았을 때와 같이 억울한 사정을 하소하였다고 합니다.(고종실록40권, 고종 37년 5월 11일)”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이렇게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