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책]김풍기교수 ‘허균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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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의 미식 지도…허균이 기록한 65가지 맛의 인문학
-유배지서 피어난 상상력… 상처 입은 영혼 달래준 ‘기억의 성찬’


1611년, 전라도 함열(익산)의 유배지.

밥상에는 상한 생선과 들미나리가 전부였고 쌀겨조차 귀했던 그곳에서, 한 선비는 기억 속의 산해진미를 글로 불러냈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이자 자유주의자였던 허균(許筠)이 남긴 조선 최초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의 탄생 배경이다.

신간 ‘허균의 맛’은 허균이 남긴 이 짧고도 강렬한 음식 기록을 현대적 감각과 인문학적 통찰로 되살려낸 책이다. 저자인 김풍기 강원대 교수는 허균의 원전에 담긴 65가지 식재료를 매개로 17세기 조선의 풍경과 그 속에 담긴 인간의 욕망, 그리고 치유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복원해냈다.

책의 모티프가 된 ‘도문대작’은 “푸줏간 문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먹을 수 없는 처지지만 흉내라도 내며 심리적 만족을 얻으려 했던 허균의 절박함이 묻어나는 제목이다. 책에서 가장 극적으로 묘사된 음식은 ‘방풍죽(防風粥)’이다. 임진왜란 당시 아내와 갓난아기를 잃고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강릉 외가에서 맛본 이 죽에 대해 허균은 “달콤한 향기가 입에 가득해 사흘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단순한 미각의 기록이 아니라, 전쟁의 트라우마와 가족을 잃은 슬픔을 어루만져준 ‘영혼의 치유식’이었다고 해석한다.


허균이 이처럼 상세한 음식 비평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독특한 이력 덕분이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선조 40년(1607년), 궁중의 식재료와 연회를 관장하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직을 약 5개월간 수행했다. 이 시기 그는 공물로 올라오는 전국의 진귀한 특산물을 섭렵하며 미식의 지평을 넓혔다. 책은 곰 발바닥(웅장), 사슴 꼬리(녹미) 같은 북방의 희귀 요리부터, 기름기가 호박(琥珀)처럼 엉긴 평안도의 꿩고기(고치), 그리고 동해의 붉은 대게까지 조선 팔도의 맛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허균에게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그가 관리로서 경험한 공적 기록이자 개인적 미식 탐험의 결과물이었다.

◇김득신의 ‘강상회음도’. 사람들이 물가에서 붕어찜에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하지만 ‘허균의 맛’은 맛의 예찬에만 머물지 않는다. 허균의 시선을 통해 화려한 진상품 이면에 감춰진 백성들의 눈물도 함께 읽어낸다. 한겨울에 평양의 얼린 숭어(동수어)를 한양으로 나르기 위해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 오징어 먹물로 문서를 위조하던 세태 등 음식 재료 하나하나에 얽힌 당대의 사회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책은 총 2부로 구성됐으며, 1부에서는 식재료별로 65편의 에세이를, 2부에서는 독자들이 원전의 맛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도문대작’의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수록했다. 굶주림 속에서 피어난 미각의 상상력을 통해 400년 전 조선의 밥상을 만나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글항아리 刊, 480쪽,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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