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특집]오대산사고본 실록·의궤 110년만의 귀향(歸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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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예산안 통과되면서 ‘환지본처’ 확정
평창에서 일본, 서울, 다시 평창 험난한 여정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궤 범도민 환수위원회 출범식이 2021년 6월 정념 월정사 주지스님, 조정래 소설가, 김동호 전 강원문화재단 이사장, 김헌영 강원대 총장, 최윤 민주평통 강원부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평창 월정사 조선왕조실록·의궤박물관에서 열렸다. 강원일보 DB

제자리 돌아오는 조선왕조실록·의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과 의궤의 평창 귀향(歸鄕)이 최종 확정되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들 문화재가 일제의 약탈에 의해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에 의해 우리의 국권이 상실되면서 문화재 주권까지 일제에 종속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민간 주도로 진행된 문화재 제자리찾기 운동을 통해 천신만고 끝에 국내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정부가 환수의 주체가 되면서 평창으로의 귀환은 난항을 겪게 된다.

결국 지난해 12월24일 오대산사고본 문화재의 평창 이관과 관련된 ‘국립조선왕조실록전시관 운영 예산(15억4,200만원)’ 이 포함된 2023년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불가능할 것 같던 ‘환지본처(還至本處·제자리로 돌아감)’가 마침내 확정되기에 이른다. 약탈된 강원 문화재의 고향 찾기, 그 고달팠던 여정을 되돌아본다.

◇2006년 4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가 도쿄대를 방문, 도서관 사사카와 이쿠오 사무부장과 면담을 갖고 일제시대 강탈된 실록 오대산 사고본의 조속한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913년 일제에 의해 불법 반출

관동대지진때 불타 47책만 남아

2006년 제자리찾기 운동 본격화

■ ‘기증’이라는 이름의 약탈=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이하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한일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패망한지 3년만인 1913년 조선총독 데라우치와 도쿄대 교수 시로토리(白鳥庫佶)의 결탁으로 788책이 약탈돼 주문진항을 통해 도쿄대에 불법으로 반출된다. 실록은 10년 후인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불에 타 소실되는데, 이때 대출된 74책 만이 화를 면하게 된다. 이 가운데 일부(27책)가 1932년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으로 되돌아온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의궤(이하 오대산사고본 의궤)는 1922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후 식민통치와 수탈을 위해 세운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 왕실 사무를 담당하는 궁내청으로 보내져 타향살이를 시작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일제가 오대산사고본 실록·의궤를 약탈하면서 대외적인 명분을 찾기 위해 ‘기증’이라는 꼼수를 썼다는 것이다. 우리가 치욕의 역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2007년 8월 일본 궁내청(왕실)이 보관하고 있는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의궤의 반환을 돕기 위해 평창 오대산 사고를 직접 방문한 일본 정치인들에게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이 조선왕실의궤가 있던 오대산 사고를 설명하고 있다. 강원일보 DB

■어떻게 발견됐나=오대산사고본 실록은 1984년과 1987년 그 실체가 확인된다. 계명문화대학 배현숙 교수가 관동대지진 이후 도쿄대가 회수한 오대산사고본 실록의 잔본들을 도쿄대의 ‘소잔본목록(燒殘本目錄)’을 통해 확인하고 조사하면서부터다. 특히 2004년 도쿄대 도서관에서 오대산사고본 실록 47책이 도쿄대 도서관 귀중서고에 보관돼 있다는 기록을 재확인하고 약탈 경로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2006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출범과 함께 문화재제자리 찾기 운동은 본격화된다. 오대산사고본 의궤는 오대산사고본 실록의 제자리찾기 운동의 시작과 함께 오대산사고에 보관돼 있던 다른 문서들의 행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본 궁내청 내 서릉부왕실도서관에 ‘명성황후 국상도감의궤’ 등 72종이 소장돼 있음이 확인된다.

2006년 11월 월정사 경내에서 마련된 오대산사고본에서 봉행된 조선왕조실록 환국 고불식 모습. 강원일보 DB
◇2011년 12월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의궤가 환국을 기념하기 위해 오대산 월정사 대법륜전에서 봉행된 ‘고유제(告由祭)’ 모습 강원일보 DB

日정보 '기증' 방식으로 국내 반환

문화재 관리규정 따라 서울에 보관

강원인 노력끝에 '환지본처' 확정

■민간주도의 제자리찾기 운동 전개=월정사 등 민간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재 제자리찾기 운동은 오대산사고본 실록이 일제에 의해 약탈된지 93년만인 2006년 들불처럼 일어난다. 민간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1965년 체결된 ‘한·일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을 통해 약탈된 문화재에 대한 주권이나 청구권이 박탈된 정부를 민간이 사실상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협정의 존재는 환수운동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지만 환수위원회가 문화재의 ‘불법 점유’ 사실을 규명해 법정소송으로 환수운동을 진행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도쿄대가 그 해 서울대에 ‘기습적’으로 오대산사고본 실록을 기증한다.

오대산사고본 의궤 환수운동도 쉼없이 진행된다. 환수위는 법원에 ‘조선왕실의궤 반환’ 조정 신청서를 접수하고 한·일 국회와 북한까지 참여시켜 반환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등 꾸준하고 조직적인 대응을 펼쳤다. 이같은 노력으로 2010년 간 나오토 日총리의 ‘도서 반환계획 발표’를 받아내고 이듬해 오대산사고본 의궤의 환국까지 성사시킨다. 이번에도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기증’하는 방식이었다.

◇2010년 12월 조선왕조실록·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가 주최하고 강원일보사와 새평창포럼이 주관한 ‘조선왕조 500년의 넋을 담다, 기록문화의 꽃 조선왕조실록·조선왕실의궤 제자리찾기 심포지엄 모습. 사진=강원일보DB

■가로막힌 ‘귀향’의 꿈=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이 내세운 논리 그대로 ‘반환’이 아닌 ‘기증’ 형식으로 돌려받을 수 있었던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는 국유문화재의 지위를 얻으면서 또다른 시련과 맞딱뜨리게 된다. 문화재보호법(제7장·국유문화재에 관한 특례)에 국유문화재 관리를 지자체장에 위임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문화재청장이 관리·총괄한다는 규정을 들어 서울대 규장각(실록), 고궁박물관(의궤)으로 보관처를 결정한다.

이후 2016년에는 관리 주체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일원화 돼 확정된다. 문화재 당국은 이들 문화재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항온·항습 기능을 갖춘 시설이 지역에 없다는 것을 원소장처 반환 불가의 가장 큰 이유로 들었지만, 이를 충족할 ‘왕조실록·의궤 박물관’이 2019년 월정사 인근에 세워진 뒤에도 정부는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의 영인본(복사본)만을 보내 전시장을 꾸미게 하는 이해하지 못할 행태를 보여왔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궤 조기 환지본처 기원을 위한 기념식수식이 올 3월 월정사 왕조실록·의궤박물관에서 정념 월정사 주지 스님, 박진오 강원일보 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있었다. 강원일보DB

■마침내 이뤄지는 ‘환지본처’=2006년과 2010년 각각 고국으로 돌아온 오대산사고본 문화재들이 고향땅에 모시는 것이 무산되자, 오대산사고의 수호사찰인 월정사는 2011년 강원도내 각계 각층이 동참하는 ‘조선왕조실록 및 왕실의궤 제자리찾기 추진위원회를 창립’한다. 수많은 토론회와 심포지엄, 캠페인을 통해 오대산 봉안의 당위성을 알리는데 주력했지만 관계 당국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반전의 기회를 잡은 것은 2021년 6월 월정사와 평창군, 강원일보가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궤 범도민 환수위원회’를 창립,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도내는 물론 정부와 국회를 대상으로 한 환수위의 홍보와 설득작업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됐고, 국회는 ‘환지본처’를 지지하는 결의안의 본회의 통과로 화답했다. 결국 월정사가 ‘왕조실록·의궤 박물관’을 정부에 ‘기부채납’ 한다는 초강수를 두면서 얽혀있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물밑 접촉을 통해 월정사와 문화재청 간 소유권 이전과 관련된 법적·행정적 논의와 절차가 모두 마무리됐고, ‘국립조선왕조실록전시관’ 운영 예산까지 세워지면서 110년만의 ‘귀향’을 확정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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