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특별기고]부끄러움과 참회의 힘을 가르쳐준 우리 시대의 스승

설악 무산 스님 5주기를 기리며

이홍섭 (시인)

설악 무산스님께서 입적하신 지 벌써 5년이 되었다니, 스님의 시구절(타향)처럼 삶이 ‘하룻밤 객침(客枕)’ 과 같은 무상함을 지울 수 없다. 젊은 날, 유발상좌로 스님을 시봉하는 지복을 누렸기에 ‘이승의 삶은 그 모두 타향살이’이자 ‘하룻밤 객침’이라는 스님의 가르침은 여전히 화두처럼 활활하게 살아있다.

설악 무산스님은 생전에 설악문중의 제일 어른인 ‘조실’과 조계종의 가장 높은 품계인 ‘대종사’에 오르셨고, ‘조오현’이라는 필명으로 쓴 시를 통해 한국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스님의 업적은 설악산처럼 높고 동해처럼 장중하지만, 5주기를 추모하며 이를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일평생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오신 스님의 성품이나 행적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스님께서는 온갖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낙산사와 백담사의 백년중창을 일거에 이루셨지만, 먼 훗날 누가 집 지은 사람을 기억하겠느냐며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진실된 발자취’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스님께서 선원에서 참선 정진하는 수좌스님들을 각별하게 위하고, 오갈 데 없는 문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것은 이들이 어둡고 답답한 우리 사회의 빛이자 숨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는 “남의 눈에 눈물 흘리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설파하시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세상이 부처님 세상이라고 강조하셨다. 스님께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챙기신 분들이 백담사가 있는 인제군 용대리의 주민들이었다는 사실은, 스님의 가르침과 언행일치를 여실히 상징한다.

스님께서는 겉으로는 호랑이 같으셨지만, 내면은 늘 부끄러움이 가득하셨다. 시는 이 부끄러움을 담는 내면의 그릇이었다. 스님의 부끄러움은, 마치 칼 위에 서 있듯 철저하게 자신을 참구하고, 이마에 낙인이 찍힌 죄수처럼 누구보다 처절하게 참회를 거듭했던 수행 정진의 결과였다. 스님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보고도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산일 中)”라고 읊을 정도로 늘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부끄러움이 시의 동력이었고, 부끄러움이 자비의 원력이었다.

스님은 떠나시기 두 달여 전,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셨다. “천방지축 기고만장 허장성세로 살다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입적 후 이 열반송이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어떤 이는 “이런 열반송도 다 있나?”라고 물어왔고, 어떤 이는 “스님답다”라는 감탄을 표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스님을 시봉했던 나에게는 이 열반송이 참으로 친숙하게 다가왔다.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다는 표현은 “피모대각(被毛戴角)”이라는 선불교의 언어를 풀어쓴 것으로, 스님께서 살아생전 스스로를 경책하실 때 한숨을 쉬듯 자주 내뱉으시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시던 스님의 진면목이 이 피모대각이란 표현에 핏물처럼 배어있다.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셨던 무산 스님을 추모하고, 선양하는 길은 앞으로도 여러 갈래로 진행될 것이다. 같은 부모가 돌아가도 자식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모하듯, 스님과 맺은 인연과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스님을 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어온다면, 나는 이 부끄러움의 힘과 참회의 정신으로 스님을 그리워하고, 스님을 추모한다고 말할 것이다. 스님이 곁에 계신 듯, 뵙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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