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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 ‘혼맥(婚脈)’

유교 뿌리가 깊은 동양에서는 관혼상제를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 여긴다. 혼인은 인생에서 중하디 중한 일로 꼽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잦아들자 밀렸던 결혼이 잇따르며 SNS로 청첩장들이 날아드는 가을의 문턱이다.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젊은 세대들이 늘고 있다지만, 그래도 결혼은 각박한 세상살이에 가장 아름답고, 축복받는 순간이다.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 위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결혼은 설렘, 희망, 미래, 꿈 등으로 예비된 의례다. ▼세간에 ‘혼맥지도’가 회자되고 있다. 본 적 없지만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명문가들의 얽히고설킨 혼인 관계를 알기 쉽게 도표로 만든 책일 테다. 구체적인 사실 관계는 뒤로하고, 3권에 억대 책값이 오간 건 인정되고 있다. 저작권 운운하는 걸로 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책은 아닌 듯싶다. 어렵게 자료 수집하고, 당사자들을 설득해 만든 귀한 자료라면 가치가 없지는 않을 듯싶다. ▼봉건시대 계급 사회에서는 명문 가문이 따로 있었다. 그들끼리 후손들을 서로 엮어 기득권을 유지하고 세력을 지켰다. 심지어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전략적인 혼인을 통해 동맹, 혈맹을 구축, 생존을 담보했다. 가족으로 뭉친 힘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돈독히 하고, 불신으로 가득 찬 강호에서 든든한 연결 고리로 작용했을 테다. 그때 혼맥은 드러내 놓고 작용하는 보증수표 같은 수단이 됐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계급 사회가 종식되고 개인을 중시하는 의식이 깨어나면서 세상은 바뀌었다. 산업화로 자본가들이 양산되면서 신지배층으로 대체됐다. 고위 관료와 자본가들이 결합해 권력층으로 울타리를 높였다. 혼맥을 만드는 핵심은 잘난 요소를 결합시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도다. 부조리의 출발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서로에 대한 인간적, 인격적 배려와 신뢰가 없는 혼인은 쉽게 파국을 맞는다. 사랑이 빠진 ‘가진 자들’의 혼사는 단순한 ‘짝짓기’에 불과하다. 겉치레 ‘혼맥지도’보다 사회 지도층의 방탕한 관계를 담은 ‘러브지도’가 더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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