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발언대]양양 38선 돌파 의미 잊어서는 안 돼

최종한 민족통일양양군협의회 부회장·시인

최종한 민족통일양양군협의회 부회장·시인

국군의 위용과 발전을 기리고 노고를 위로하는 국군의 날이 다가온다.

6·25전쟁에서 육군 제3보병사단은 10월1일, 최초로 38선을 돌파, 북진했다. 우리 육·해·공군은 각기 다른 군의 기념일을 통합하고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에서 이날을 국군의 날로 정했다.

북의 기습남침에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려 괴멸 직전에 처한 UN군과 국군에게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은 과연 신의 한 수였다. 이를 계기로 UN군과 국군은 역공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승리를 거듭하면서 북진하던 육군1군단 예하 김백일 장군이 이끄는 3사단은 9월29일,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 38선까지 진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에 있는 UN군 사령관인 맥아더의 작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에게 황급히 연락한다. “참모총장! 국군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네 각하! 3사단이 양양의 38선까지 진격하여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뭐야? 아니 총장은 누구의 부하인가? 맥아더의 부하인가? 나의 부하인가? 무슨 맥아더의 명령을 기다린단 말인가? 빨리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라.”

UN군 사령관인 맥아더의 대기명령을 무시하고 무조건 북진을 감행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추상같은 명령이었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즉시 김백일 장군에게 명령하였고 23연대 김종순 연대장이 이끄는 백골부대의 10중대가 역사적인 38선 돌파를 감행하게 되었다. 이때가 1950년 10월1일, 11시25분이라고 한다. 이는 후일 국군의 창설일이 아닌 38선 돌파 기념일로 대한민국 국군의 날을 정한 유래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 일찍이 민족통일양양군협의회에서 38선 표지석을 웅장하게 건립했으며 십수년째 회원들이 호국영령들을 위한 추모제와 민족통일기원제를 자발적으로 지내오고 있다.

그러함에도 양양의 38선 표지석과 순수한 추모행사는 제대로 된 세간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의 추모제에는 오랜만에 육군 8군단장이 참석했다. 과거에 8군단에서 역사적인 38선 돌파전투 재현행사를 한 적도 있기는 했다. 8군단장과 회원들 간 대화에서 당시 백골부대원으로 직접 38선을 돌파하셨던 구순의 오상추 전 강원도협의회장님이 그때의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셨다. 그때 3성 장군인 8군단장은 순간 말을 멈추고 돌연 차렷 자세를 취하며 당시 백골부대원인 어르신께 거수경례를 올리는 진풍경이 펼쳐져 모두 숙연해지기도 했다.

요즘 MZ세대들과 대화를 해보면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성에 대해서 느끼지도 못하고 분단의 아픔, 수복지구의 애환 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국가관, 애국심도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이 도발의 수위를 점점 높이고 있는 시점에 양양의 38선 표지석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향후 38선 표지석 주변에 국군의 날 제정의 유래와 6·25전쟁 관련 자료, 전 세계 유일무이한 분단국가의 현실, 애국심, 통일관, 국가관 등을 젊은이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생생한 사료관을 건립하여 안보교육에 활용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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