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조상들은 두루미를 '학(鶴)'이라고 부르며 길조로 여겼다. 천년을 산다고 해 십장생 중 하나로 꼽았고 병풍에 학을 그려넣어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꼿꼿하게 서있는 하얀 자태는 고고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선비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기 전 흔히 주고 받던 새해 연하장에도 학은 단골 손님이었다. 두루미는 옛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새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학'에는 6.25전쟁 중이던 어느날, 38선 접경지역을 배경으로 친구의 순수한 우정을 통해 이념 갈등을 극복하는 내용이 담겼다. 성삼이와 덕재는 한 마을에서 자란 친구다. 전쟁을 전후해 성삼이와 덕재는 각자 다른 진영에 속한다. 시간이 흘러 성삼이는 어떤 마을에서 포승줄에 묶인 덕재를 호송한다. 마침 학 떼를 발견한 성삼이는 덕재와 학을 잡아 장난을 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어느날 사냥꾼이 학을 잡으러 왔다는 소문에 두 사람은 학을 풀어준다. 회상 끝에 성삼이는 학 사냥을 핑계로 덕재의 몸에 감겨 있던 포승줄을 풀어준다. 덕재는 자유의 몸이 되고 마침 하늘 위로 학이 날아간다. 소설 속 '학'에는 전쟁과 이념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평화와 자유를 갈망하는 순수한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다.
겨울로 접어들며 두루미가 철원을 찾고 있다. 두루미는 시베리아 등지에서 지내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지역인 한반도와 일본 등지로 내려와 겨울을 보내고 다시 올라간다. 두루미가 한반도 내 겨울 보금자리로 선택한 철원은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그 여파로 생겨난 민간인 출입통제선과 비무장지대 등 군사지역은 두루미가 지내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 됐다. 드넓은 철원평야에서 볍씨를 주어먹고, 한탄강 상류 습지에서 작은 물고기와 다슬기를 잡아 먹는다. 천적을 피해 습지에서 잠을 잔다. 아침 일찍부터 먹이를 구하기 위해 비상하는 두루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같다.
귀한 손님인 두루미를 보호하기 위한 지역사회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민통선 내 철원평야에 내려앉는 두루미의 가장 큰 위험요소는 전깃줄이다. 대형 조류인 두루미가 전깃줄과 충돌해 부상당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이에 주민들로 구성된 두루미 보호단체는 두루미 보호 캠페인을 벌였고 한전 철원지사는 이에 호응해 두루미 서식지와 인접한 전깃줄에 시인성이 좋은 보호 표지판 300여개를 부착했다. 지자체도 두루미 보호를 위해 정부 공모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두루미보호단체와 협업해 '두루미생태마당' 행사를 개최, 두루미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다.
이 같은 지역사회의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매년 3,000여마리의 두루미가 민통선 내 철원평야를 찾아 월동하고 있다. 두루미를 보기 위한 탐조관광도 자리를 잡았다. 최근 새롭게 문을 연 동송읍 이길리 두루미 탐조대를 비롯해 삽슬봉 두루미 생태탐조대, 월정리역 등 두루미를 관찰할 수 있는 탐방프로그램에도 탐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매년 겨울철 두루미를 보기 위해 철원을 찾는 탐조객들은 4,000여명에 달한다. 두루미 보호를 위해 애를 써온 지역사회의 노력이 빛을 보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철원은 이제 두루미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