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되돌아온 오대산사고본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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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지본처(還至本處)’된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세차례에 걸쳐 환수된다. 관동대지진 이후 9년만에 경성제국대로 옮겨진 27책이 첫번째이고, 대대적인 문화재 제자리찾기 운동을 통해 2006년 일본 도쿄대에서 돌려받은 47책의 환수가 두번째다.

그리고 2017년 국립고궁박물관이 일본의 한 경매에서 사들인 ‘효종실록’ 1책(전체 22책)을 우리나라로 가져 온 것이 마지막이다. 이로써 현재까지 남아있는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75책이 된다. 가장 나중에 발견돼 회수된 효종실록은 다른 오대산사고본과 마찬가지로 내지에 쓰여져 있는 ‘동경제국대학도서인(東京帝國大學圖書印)’으로 출처를 특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오대산사고본 효종실록은 1658년(효종 9년)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비록 1년 동안의 짧은 기간이지만 나라 안팎의 급변하는 정세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실록의 초반에는 삼척부사로 부임하기 전의 미수(眉叟) 허목(1595~1682)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헌부의 정5품 관직인 지평(持平)으로 삼았다는 대목이 세차례 등장한다. 이듬해인 1659년에 이르러 정4품 장령(掌令)에 오른 허목은 북벌정책에 대해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하는 옥궤명(玉几銘) 왕에게 지어바치기도 했다(효종실록 21권· 효종 10년 3월 12일) . 사사건건 송시열과 대립하던 허목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벌어진 ‘복제논란’ 이후 삼척부사로 임명된다.

◇효종이 두번째 나선정벌과 관련해 청나라가 요청한 군량을 보내주겠다고 청차(淸差)에게 답하는 내용을 담은 효종실록 20권·효종 9년 3월 3일의 내용.

청나라에서 8년간 인질생활을 경험한 효종은 병자호란의 패배와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북벌정책을 세우고 군사력 강화에 나섰다. 하지만 북벌정책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오히려 청나라를 도와 두차례 나선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에 앞서 청나라에서 칙서를 갖고 내려온 청차(淸差·임무를 띠고 청에서 내려온 관원) 이일선은 다섯달치의 군량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전한다. 이에 효종은 “먼 지역에 군량을 운송하자면 형세상 매우 어렵기는 하겠으나, 어찌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소.(효종실록 20권·효종 9년 3월 3일)”라고 답한다. 표면적으로는 또다른 굴복처럼 보이지만 파병을 통해 청의 군사력을 가늠하고 조선의 군사력 수준을 시험하는 무대도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돕는 모양세를 취한 것이다. 실록에는 효종이 “적의 형세는 어떠하오?”라며 넌지시 전쟁 상황에 대해 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이일선은 상당히 상세한 정세를 보고한다. 오대산사고본 효종실록에서는 1658년 효종이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신하들에게 효과를 묻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효종실록 20권·효종 9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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