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황의 ‘춘주지’ 교원편에 춘천향교 기록을 보면 “향교는 동쪽 산록 청룡 끝자락에 있었는데 임진란으로 불에 탄 후 갑오년(1594년)에 춘천부사 서인원(徐仁元)이 중건하고 위판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을 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록은 없었다.
필자는 근래에 춘천향교 중건을 위하여 지역 유생들의 상서(上書)를 새롭게 발견하였다. 당시 춘천향교 도유사를 지낸 최충원(崔忠元·수성최씨)이 병신년(1596년)에 강원도 순찰사가 된 한강(寒岡) 정구(鄭球)에게 향교 중건을 위해 쓴 상서문(建學都有司生員崔忠元等上江原巡察使書(건학도유사생원최충원등상강원순찰사서)(丙申秋鄭寒岡球爲方伯(병신추정한강구위방백))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난 지 5년에 국가의 일은 어려움이 많아 조정을 가시덤불에서 창설하고 종묘의 제사를 사사(私祠)에서 지내니(...) 새로 짓는 것은 기약이 없어 향교에 모든 학생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분연히 중수할 뜻이 있어 동료들에게 꾀를 구하고, 스승들에게 아뢰어 공손히 편지를 가지고 궁궐에 올려 나아가서는 윤허하는 음성을 받들고 물러나서는 재물을 모을 계책을 하였습니다.(...) 위나라 문공의 열 가지 정치에는 권학이 첫머리에 있고, 왕맹의 여덟 가지 정치행정 조목에는 학교가 하나를 차지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다시 학교(향교)를 세워야 한다는 설명을 부연한 것이니 바라건대 미치광스럽고 참람하다고 물리치지 마소서.”
윗글을 통하여 엄황의 ‘춘주지’에 춘천부사 서인원이 1594년 춘천향교를 중건하였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1596년에도 완공이 안 된 것으로 파악된다. 내용 중 전란으로 파괴된 향교 재건을 위해 유생들이 결의문을 임금에게 상소하여 윤허를 받았으나, 중건을 위한 재물이 넉넉지 못하여 몇 년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 지역 유생들의 노력이 보이는 장면이다.
춘천고등학교는 1924년 4월25일 개교, 올해 100주년이 된다고 한다. 1950년 6·25전쟁으로 교실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남쪽으로 피난 후에도 대구, 부산, 원주에서 천막으로 개교하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1955년에는 현 위치에 재학생들이 소양강에서 모래와 자갈을 채취해 새롭게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춘천향교 중건을 위한 유생들의 명분은 문교(文敎)와 도학 실천 그리고 성현들을 위한 공간인 대성전 건립이었다. 428년 후 6·25전쟁으로 소실된 춘천고등학교 학생들의 모교 건립을 위한 자구 노력은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면학 정신은 같은 것이라 하겠다.
2,000년 전 중국의 5호 16국 시절 진나라의 왕맹(王猛)이라는 관리는 무릇 국가의 정치에는 교육이 첫째이며, 국가의 흥망이 교육에 있음을 갈파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이 매우 심각하다고 한다. 봄학기와 선거철이 돌아왔다. 교육자들과 위정자들은 왕맹의 교훈을 깊이 새기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