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광부엄마]“도시 주변에서 밀려난 사람 탄광 모여들어…그 중 가장 약자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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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탄광문화 연구 평생 바친 학자·문인
아버지에 이어 2대째 광부 출신…탄광의 삶과 문화 기록하고 알려
근대화 기수, 산업전사 거창한 구호와 달리, 광부 삶은 경제적 막장
남성·광부 중심의 탄광촌에서 여성은 많은 금기와 희생 강요 받아
죽은 남편 대신 탄광에서 일한 선탄부, 전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

장성광업소 근무 당시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오른쪽 두번째)과 동료광부들

태백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연수(61) 탄전문화연구소장(문학박사)은 광부였다.

국영기업인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취업은 광부였던 아버지의 꿈이었다. 그는 부모님을 위해 태백기계공고에 진학했고 1982년 고교 졸업 후 대를 이어 광부가 됐다.

하지만 탄광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료 광부들은 모두 “5년 만 막장에서 고생하다 이 동네를 뜨겠다”며 현실을 한탄했다. 모두 농촌이나 도시에서 기반을 잃고 떠밀렸지만 삶을 이어가기 위한 강한 의지로 막장까지 온 사람들이었다. ‘인생 막장’ 이야기를 듣다보니 스스로 ‘철이 없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탄광의 모순’ 알리고 싶었다=태백기계공고, 정선 함백공고, 영월공고, 삼척공고, 도계실업고, 충북 제천 한국광산공고. 탄광촌마다 공고가 있었고 광부는 탄광촌 학생들의 꿈이었다. 학교와 탄광촌 곳곳에는 ‘우리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 ‘우리는 산업전사 보람에 산다’는 구호가 넘쳐났다. 당시 산업화 과정에 진입한 정부는 석탄증산이 절실했고 광부가 필요했다. 하지만 막장은 모순의 공간이었다. 광부의 인권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광부에 대한 얼차려, 간부의 구타까지 만연했다. 그는 탄광촌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알리고 싶었다. 굴진·채탄·보갱 등 다양한 직종의 광부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1989년 정부가 일방적으로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발표·시행했다. 광부는 물론 탄광촌 주민들도 몰랐던 일이다. 대체산업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러운 폐광을 위한 정책이 시행됐다. 정 소장은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친구와 시집 ‘단단한 석탄, 팔리지 않는 우리들의 희망’을 발행했다. 안동, 대구, 울산, 부산, 대전, 청주 등 전국을 다니며 시집을 배포하고 탄광촌이 처한 현실, 막장 인생을 살아가는 광부들의 고통, 일방적인 정부의 폐광정책을 알렸다.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이 지난 4월 8일 강원대 도계캠퍼스에서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삼척=최두원기자

■탄광의 가장 약자는 여성=정 소장은 탄광을 도시 주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이는 경제적 막장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탄광촌에서도 가장 약자는 여성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특정 산업이 집단 공동체를 이룬 곳은 농촌, 어촌 그리고 석탄 산업을 기반으로 한 탄광촌 뿐”이라며 “탄광촌 역시 100여년의 역사를 통해 전통적 삶과 문화를 다양하게 구성해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탄광촌은 남성 중심의 사회로 가장인 남편, 즉 광부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겨우 생존이 가능했던 열악한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며 “다른 도시는 (여성이 할 수 있는)일자리의 기반이 있었지만 탄광촌은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광부들이 출근할 때 여자들이 앞길을 지나서는 안된다는 금기, 광부가 출근할 때 뒤를 돌아보지 않고 광부의 아내는 잘 다녀오라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금기가 있었다”면서 “오늘 막장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았고 여성은 위험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입밖에 꺼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물려준 일자리 ‘선탄부’=막장에서 올라온 석탄더미에서 열량이 높은 정탄과 돌, 경석 등을 골라내는 선탄부는 탄광의 유일한 여성 일자리다.

탄광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주로 선탄부로 근무했다. 우리나라 탄광에서만 존재하는 독특한 직종, 입직의 형태였다.

정 소장은 “선탄부는 3교대로 일했다. 탄광에서의 노동 외에 가사, 육아의 부담도 짊어졌다. 아이들이 아침에 학교 가는 일, 학교 갔다 온 아이들 보살펴주는 일, 잠자리 살펴주는 일 등의 일상적인 양육도 어려웠다”며 한 선탄부의 사연을 소개했다.

“광산에서 남편을 잃은 선탄부 할머니는 밤 12시에 퇴근했지만 아이들이 문을 잠그고 잠드는 바람에 한겨울에 노숙을 했다. 다음날 밤늦게 들어오니까 문을 잠그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도둑이 들어 쌀을 다 가져갔다. 기가 막힌 일들이 선탄부의 가정에서는 일상처럼 벌어졌다”

정 소장은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었다고 부인이 그 일을 이어받는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다. 아이들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탄광촌에서는 탄광 밖에 일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그 당시 탄광이 광부의 희생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특혜라면 특혜”라고 말했다.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이 지난 4월 8일 강원대 도계캠퍼스에서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삼척=최두원기자

■새로운 꿈…탄광문화가 신(新)산업이 되길=1991년, 그는 10년간 근무한 장성광업소를 퇴사했다. 일시불로 받은 퇴직금을 모두 쏟아부어 ‘탄전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탄광의 금기와 유행어를 모아 학계에 알리고, 탄광의 민요를 발굴하고, 탄광촌 고유의 풍속사를 기록했다. 탄광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대학 강단에도 서고 있다.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가 일생을 바쳐 정리해온 탄광문화가 새로운 산업, 폐광지의 대체산업이 되는 것이다. 올해 장성광업소, 내년 도계광업소가 문을 닫으면 대한민국의 탄광과 탄광문화를 함께 ‘석탄산업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꿈이다.

정 소장은 “세계 경제 10대 대국, 한강의 기적 같은 찬사도 목숨을 바쳐가며 석탄을 캤던 광부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산업 전사인 광부들의 정신, 그리고 열악한 막장의 현실과 삶을 극복하고 희망을 이뤄낸 것을 계승해야 한다”며 “전 세계 17개의 광산이 유네스코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의 석탄산업 유산을 지켜낸다면 탄광문화를 활용한 새로운 세계적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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