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여인열전② 장희빈(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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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 이상 기후 현상이 벌어진 것이 장희빈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라고 쓰고 있는 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 11월 1일 병진 1번째기사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희빈’이라는 명칭은 내명부의 품계를 말하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장옥정에게 내려진 후궁의 등급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빈(嬪)은 후궁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품계인 정1품에 해당한다. 후궁 신분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셈이다. 정5품인 상궁을 시작으로 숙원→소원→숙용→소용→숙의→소의→귀인 등 무려 8단계를 거쳐야 오를 수 있는 정상의 자리다. 장옥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임금의 정실 부인인 비(妃)의 자리에 까지 올랐기 때문에, 그를 입지전적 인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그의 신분 상승 이면에는 붕당정치의 격랑 속에서 찾아 온 기막힌 타이밍의 ‘우연’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첫 번째가 숙종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1661~1680)의 죽음을 들 수 있다.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은 숙종과 장희빈이 인연을 맺은 것과 관련해 “(장씨는)경신년(숙종 6년·1680년)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비로소 승은(承恩)을 입었다(始得承恩·국사편찬위는 “은총을 받았다” 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과 인경왕후 사이에 후사가 없었던 것도 장희빈에게는 기회가 됐다. “인경왕후는 (중략) 국운이 불행하여 뜻밖에 승하하였고, 또 후사가 없으니, 상하의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숙종실록 11권, 숙종 7년 1월 3일)”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곧바로 장희빈을 궐 밖으로 내쫓아 버린다. 그리고 바로 1년 후인 신유년(1681년) 인현왕후를 새 중전으로 맞이하게 된다. 중전의 자리에 오른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입궐을 명성왕후에게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명성왕후는 인현왕후에게 “내전(內殿·인현왕후)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중략)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라고 경계의 말을 남긴다. 하지만 장희빈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명성왕후(1642~1683)가 타계하면서 궐 밖으로 내쳐진 장희빈은 불과 3년만에 재입궁의 기회를 잡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인현왕후 요청이었다는 것이다.

사관들은 후에 숙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장희빈이 조선왕조의 역사 안으로 발을 들이게 된 1680년,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장희빈이 승은을 입은 그해의 이상 기상 현상에 대해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장녀(張女·장희빈)가 일개 폐희(嬖姬·임금의 총애를 받는 후궁)로서… (중략) 화란(禍亂·재앙과 난리)을 끼치고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그녀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으니, 이로써 하늘이 조짐을 보여 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 11월 1일·사진)” 당시에 관측된 불길한 기상이 악녀의 출현을 예고했다는 식의 표현이다. 장희빈은 과연 악녀로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붕당(朋黨) 대립의 승자가 쓴 역사 속에서 악녀로 그려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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