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만원짜리 물고 다녔던 동네 묵호=사람과 물자가 몰리면 돈이 돈다. 그러면 소위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말처럼 '개가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반드시 따라오게 된다. 지역의 영화(榮華)와 번성(繁盛)의 상징처럼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설같은 이야기 말이다. 묵호항 주변을 한발 한발 내딛으면 담장에 그려진 다소 투박해보일지라도 익살스러운 그림에서 전설은 현실이 된다. 그래서 동해 묵호는 과거를 숨겨놓은 타임캡슐을 찾아가는 보물을 찾아가는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지역이다.
◇묵호의 시작=묵호로 일컬어지는 동해시 묵호동은 목호항과 대진·어달항을 보유한 전형적인 어촌지역이다. 동해시가 소개한 묵호동의 과거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게구석과 산짓골, 논골의 3개 자연촌이 합해 묵호진리가 생기면서 묵호가 탄생했다. 조금 더 과거를 살펴보면 묵호라는 지명은 강릉 부사 이유응이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응이 오이진에 난 수해 문제로 현장 시찰에 나섰다 검은새와 바위가 많다는 뜻의 오이진에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곳에서 멋진 경치를 보며 좋은 글씨를 쓰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의 '묵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전설의 태동=묵호는 유행의 첨단도시, 숲과 바람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이 산업화로 꿈틀대고 있던 시기 동해안 제1의 무역항으로 석탄과 시멘트를 실어 나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화주와 선원, 지역 주민들이 한데 모여 백화점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유행의 첨단 도시가 되었다. 또한 명태와 오징어 등 풍부한 해산자원은 묵호를 더욱 넉넉하게 했다. 이때 묵호 지역에 말 그대로 '만원짜리를 물고 다니는 개'가 곳곳에서 출현했다는 '전설'이 다시 사람과 물자를 불러 모으고 돈을 돌게했다. 동해문화원이 기록한 당시 거주했던 주민들은 "묵호의 금은방은 식사시간을 거를 정도로 바빠 정신이 없을 정도"였으며 "노가리 시장이라고 해 전국의 오징어와 노가리, 명태 건조 70%가 묵호에서 이뤄질 정도"로 분주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논골담길 산모퉁이 골목길 곳곳에 우리 이웃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쇠락과 부활= 1936년부터 삼척지역 일대의 무연탄을 실어 나르던 작은 항구 묵호항은 1941년 국제무역항으로 몸집이 커지더니 1976년에 이르러 대규모 확장공사를 통해 석탄 하역시설과 부두, 방파제 등의 보강이 이뤄졌다. 당시만 해도 국내 최대 규모의 무연탄·시멘트 수출항으로 이름을 날리던 묵호항은 1979년 동해항 개항과 함께 그 역할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명태 어획량도 급감하며 영화와 번성을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풍요의 도시는 어느날 갑작스레 을씨년스럽게 변해버렸다. 이에 동해시가 전형적인 어촌마을을 체류형 관광도시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명태를 실어 나르며 질척이던 골목길인 논골담길에 10여년간 110여개의 벽화를 입혀 묵호의 옛 생활상과 사람들의 기억, 희망을 그렸다. 위태로워 보이던 산비탈에는 산책로를 깔아 탁트인 동해바다를 옛 기억과 함께 감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특히 코로나19라는 위기에도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를 개장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저력을 보였다. 또한 묵호등대 논골담길 축제 등을 통해 지역 주민 참여형 축제로 전설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