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라떼는 말이야]어린이 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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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5월6일 강릉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 사진. 강원일보 DB

5월 5일, 어린이날이 오면 강원도의 거리와 들판은 유난히 환했다. 풍선과 깃발, 어린이들의 고운 웃음이 강바람을 타고 번지던 시절. 그러나 이 평화롭고 풍성한 모습이 당연했던 것은 아니다. 강원도에서 초기 어린이날 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본보가 보유한 1928년 강릉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서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시작한 어린이 인권운동은 전국으로 퍼졌고, 강릉에서도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공식 행사가 열렸다. 5월 6일, 강릉 곳곳애서 모인 어린이들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아직 구두보다 고무신이 익숙했던 아이들, 한복 치마를 입고 행진하던 소녀들. 그들은 무엇보다 당당했다.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라는 새로운 선언이 막 퍼지기 시작한 시대였다.

하지만 짧은 희망 뒤에는 긴 침묵이 찾아왔다. 1930년대 후반,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어린이날은 금지되었고, 도내에서도 관련 행사는 자취를 감췄다. 1945년 해방 이후, 그리고 1946년 어린이날 부활과 함께 강원도의 어린이날은 다시 살아났다. 1961년에는 아동복리법이 제정되면서 5월 5일이 법적으로 어린이날로 명시되었고, 도내 곳곳에서는 초등학교 단위의 소박한 기념식이 열렸다. 각각의 도시에서는 아이들의 운동회와 소풍이 어린이날의 핵심 행사였다. 특별한 교복을 차려입은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자전거 타기 시합, 공 굴리기, 사생대회 같은 프로그램이 이어졌고, 교실마다 아이들이 그린 '나의 꿈' 그림이 붙었다. 부모들은 일손을 멈추고 운동회장을 찾았고, 아이들은 손바닥만 한 과자 봉지를 부상으로 받아들고 환하게 웃었다.

◇1965년 강릉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 풍경. 강원일보 DB

특히 1975년, 어린이날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분위기는 또 한 번 달라졌다. 이때부터 어린이날은 단순한 학교 행사를 넘어 가족 나들이의 날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가족 단위의 피크닉 인파가 몰렸다. 도시락 가방에는 김밥 몇 줄과 사이다 병 하나, 자잘한 과자가 전부였지만, 오랜만에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1980년대 들어 강원도에도 전용 어린이 시설이 하나둘 세워졌다. 춘천 어린이회관(현 KT&G 상상마당) 개관은 상징적이었다. 과학 체험전, 인형극, 매직쇼 같은 프로그램이 어린이들을 초대했다. 당시 유행하던 공룡 모형 전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하얀 셔츠에 정성껏 달아준 리본을 매단 채, 아이들은 어린이회관을 누비며 손에 풍선을 들고 다녔다. 한참을 뛰놀다 지치면, 부모와 함께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다.

춘천 뿐 아니라 각 시군에서는 지역 방송국이 주최하는 노래자랑과 사생대회가 열렸다. 작은 트로피 하나에 눈을 반짝이던 아이들. 입상자에게 주어진 상품은 손목시계나 학용품 세트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환희가 얼굴에 번지기도 했다. 물론 어린이날은 늘 풍족했던 것만은 아니다. 1970년대까지 농촌 지역 강원도의 많은 아이들에게 어린이날은 학교에서 치르는 짧은 기념식이 전부였다.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이어지고, 모두 함께 만세 삼창을 한 뒤 기념품으로 학용품 한두 개를 받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럼에도 그날 받은 색색 연필 세트는, 먼 길을 걸어 귀가하는 동안 작은 보물처럼 주머니 속, 손에 꼭 쥐어졌다.

◇1988년 어린이날 인파로 붐비는 춘천 육림공원. 강원일보 DB

1990년대 이후 강원도 각 지역에서는 어린이날 기념 프로그램이 대형화되기 시작했다. 지역 종합운동장 등에서는 풍선 퍼레이드와 각종 체험 부스가 차려졌다. 지역 기업이 협찬하는 무료 놀이기구 이용권이 배포되기도 했다. 친구들과 함께 놀이기구를 타거나 체험을 하가 위해 줄을 서던 아이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했다. 어린이날은 강원도 단순한 공휴일 그 이상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시기에도, 이 날 만큼은 가족과 함께 자연 속으로 향했다. 강릉 경포대 해변을 따라 걷거나, 춘천 공지천에서 오리배를 타고 물살을 가르는 기억. 모든 풍경은 어린이날이라는 이름 아래 차곡차곡 쌓여갔다.

지금이야 VR 체험관, 드론 경주 같은 신기술이 어린이날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고운 한복이나 교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운동장을 달리던 그 시절 어린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강원도의 오래된 골목과 들판 어딘가에 남아 있다. 다만, 흑백사진처럼 빛바랜 기억 속에서도 선명한 것은 있다. 무엇을 입었고, 무엇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그날은 누구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부모와 선생님, 이웃 어른들이 힘을 모아 아이들을 축하해주던 그 마음만큼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어린이날을 빛내고 있다.

◇1987년 춘천 어린이회관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에서 아이들이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있다. 강원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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