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여론마당]38 민족 분단, 그 비극의 과정

유남선 (사)강원특별자치도 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

38선의 역사적 원인은 일본 제국주의, 직접적 원인은 소련의 대일 참전과 기습 점령에 있었다. 이를 제안한 것은 미국이었고, 연합국이 동의하면서 분단선은 현실화됐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는 장제스의 제안에 따라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해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합의했다. 이는 연합국 차원의 최초 공식 합의였다. 그러나 곧 이어진 테헤란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비공식적으로 한반도를 40년간 신탁통치하자는 의견을 교환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유엔 창설과 소련의 대일 참전을 가장 중대한 의제로 삼았다. 그는 스탈린과 극비 회담을 갖고 한반도를 20~30년간 신탁통치하되 군대는 주둔하지 않는 방안을 제시했다. 스탈린은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고 응답했다. 루즈벨트는 임시정부의 승인 요구를 끝내 거부했고, 광복군도 연합군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소련군이 한반도 국경을 넘지 말라 단호히 요구했으나, 훗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루즈벨트 사망 후 취임한 트루먼은 처음엔 얄타 협정의 핵심 내용을 알지 못했다. 4월 말에야 회담 기록과 원자폭탄 개발 상황을 보고받았다. 트루먼은 특사 홉킨스를 모스크바에 보내 스탈린과 회담하게 했고, 양측은 5월 28일 제3차 회담에서 한반도를 미·영·중·소 4개국 신탁통치하에 둔다는 데 합의했다. 한 달 뒤 소련은 공산당 정치국·정부·군사 합동 회의에서 대일 참전을 공식 승인하며, 일본 관동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북조선 점령을 결정했다.

연합국은 그때까지도 독립과 신탁통치만 논의했을 뿐, 미·소 분할 점령은 의제로 다룬 적이 없었다. 7월 포츠담회담에서 연합국 정상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회담 도중 트루먼과 처칠은 원자폭탄 실험 성공 보고를 받은 뒤 태도가 달라졌다. 소련의 필요성이 줄어들며, 전후 질서를 두고 협력 대신 불신과 경쟁이 시작됐다.

8월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자 스탈린은 일본 항복 전에 참전하지 못하면 얄타에서 얻은 대가를 상실할까 두려워했다. 그는 즉시 8월9일 0시를 기해 공격 명령을 내렸고, 제1극동사령부는 함경북도 나진·경흥을 공습하고 13일에는 청진까지 점령했다. 이는 얄타 합의를 파기한 기습이자, 분단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트루먼도 소련의 침공을 저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둘러 경계선 설정에 착수했다.

미국은 만주의 공산화와 한반도 해안 점령을 우려하며 군사경계선을 고민했다. 국무성과 군 내부에서는 만주 북쪽으로 선을 긋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인천과 서울을 영향권에 두는 것이 유리하다 판단해 38선을 택했다. 이안본스틸과 딘 러스크가 이를 제안했고, 트루먼은 승인했다. 소련은 홋카이도 점령을 조건으로 동의했으나, 트루먼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945년 9월2일, 맥아더는 도쿄만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받고 일반명령 1호를 공표했다. 한때 임시 군사경계선에 불과했던 38선은 곧 민족 분단선으로 굳어졌다. 이어진 6·25전쟁은 이 선을 사실상 영구적 경계로 만들었고, 155마일 전선이 오늘날까지 남았다.

결국 38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 루즈벨트와 스탈린의 신탁통치 구상, 미국의 원폭 개발과 소련의 기습 참전, 그리고 트루먼의 서두른 경계선 설정이 얽혀 만들어졌다. 독립운동·민주화운동·통일운동은 본래 한 길이었으며, 독립은 통일로써 완성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분단을 극복하는 과제를 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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