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 출신 세계적인 조각가 데이비드 로드리게스 카발레로(David Rodriguez caballero·55)가 지난 7월부터 양구백자박물관과 양구백토마을 레지던시에 입주작가로 머물며 새로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라파엘 나달의 은퇴를 기리는 특별 트로피와 국제테니스대회 무투아 마드리드 오픈 우승 트로피 제작으로도 잘 알려진 데이비드 작가를 지난 13일 양구백자박물관에서 만났다. 뉴욕과 마드리드를 오가며 활동하다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양구에 머물렀다.
■금속에 ‘첫눈에 반하다’
본래 회화 작가로 예술을 시작한 데이비드 작가는 1990년대 말 뉴욕에서 반짝이는 도심 건물에 매료돼 금속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뉴욕의 빌딩 유리창에 반사되는 빛을 보고 한눈에 반했어요. 직감적으로 운명임을 느꼈고 금속과 빛을 주요 재료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죠. 그 순간은 제 예술 인생의 큰 전환점이이에요.”
그는 접힘(오리가미·Origami)과 빛을 주요 재료로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품에서 빛도 하나의 중요한 재료라고 생각해요. 금속의 접힘과 빛이 만나면 마치 호흡하듯 끊임없이 다른 표정을 보여주죠. 금속이 빛과 접힘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아름다움에 매료돼 작업을 시작했어요.” 건축물뿐 아니라 아프리카 전통예술, 음악과 문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아이디어를 얻으며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확장했다. 그는 “예술은 직업이라기보다 인생의 방식”이라며 “창작은 제 삶 그 자체이며 빛과 금속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대화를 통해 늘 다른 길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세계를 흔든 트로피 시리즈
세계적인 조각가로 자리매김한 그는 ‘2022년 무투아 마드리드 오픈 트로피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을 스포츠 무대와 잇는 독창적 작업으로 대중적 명성을 넓혔다. 대회 20주년을 맞아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서그는 매년 새로운 우승 트로피를 제작해 컬렉션을 완성하고 있다.
첫 작품은 ‘아레테(Areté)’. 고대 그리스어로 ‘탁월함’을 뜻하는 이름을 붙인 이 트로피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돼 테니스 라켓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띠었고, 내부에는 대회가 열리는 클레이 코트를 상징하는 주황빛 마감을 더했다. 이어 2023년에는 ‘경쟁’을 의미하는 ‘아곤(Agón)’, 2024년에는 ‘행운의 여신’을 뜻하는 ‘티케(Tyche)’, 올해는 ‘움직임’을 뜻하는 ‘키네오(Kineo)’가 차례로 공개됐다. 선수들은 그의 조형예술을 담은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승리를 기념한다.
그의 작업 세계에서 특히 뜻깊었던 순간은 지난해였다. 스페인 테니스 영웅 라파엘 나달의 은퇴를 기리기 위해 제작한 조형 작품이 대회 현장에서 헌정된 것이다. 다섯 번이나 마드리드 오픈을 제패했던 나달은 “Gracias, Rafa(고마워요, 라파)”라는 응원 배너 속에서 트로피를 받아들었고, 데이비드에게도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았다고 말한다.
“라파엘은 스페인의 영웅이자 스포츠 정신의 상징이죠. 그를 위해 헌정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제게도 큰 영광이었어요. 특히 관중들이 ‘Gracias, Rafa’라는 배너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예술이 스포츠와 함께 감동을 나눌 수 있음을 실감했어요.”

그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스포츠와 예술은 본질적으로 닮아있음을 느꼈다고 말한다. “선수들은 평생을 한 순간을 위해 훈련하는데 예술가도 마찬가지예요. 운동선수들은 대회의 한 순간을 위해 모든 걸 바쳐서 훈련하고, 예술가는 작품을 선보이는 시간만을 위해 고독과 집요함 속에서 오랜 시간을 준비하죠. 처음엔 테니스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오히려 스포츠라는 조형물에서 새로운 영감이 끊임없이 피어나고 있어요.”

■양구에서의 새 시도
세계적인 무대에서 명성을 쌓은 그가 왜 한국의 작은 산골 마을 양구를 찾았을까. 데이비드는 “자연 속에서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도 도자가 유명한 여러 지역을 추천받았지만 자연 속에서 작업하고 싶어 양구를 택했어요. 뉴욕이나 마드리드에서는 늘 사람을 만나야 하고 다른 일들도 처리해야 하지만, 양구에서는 거의 인생 처음으로 하루 종일 작업만 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까지 몰입해서 작업한 경험이 없어서 스스로도 놀라워요.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제게는 새로운 도전이자 마음을 수련하는 시간이 됐어요”
그는 매일 아침 양구의 산길을 산책하며 강렬한 빛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도시의 빛이 건축물에 반사돼 생기는 반짝임이지만, 양구의 빛은 자연에서 쏟아져 나오는 눈부심이에요. 그 아름다운 빛은 제게 또 다른 작업의 출발점이 됐죠”

평소에도 조선 백자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는 한국에 머물며 국립중앙박물관을 세 차례 찾았다. “백토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역사와 정신이 담긴 매개체라는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어요. 저는 그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제 언어인 빛과 접힘을 결합하고 싶어서 공부하러 왔죠. 언제 공개될지 모르지만 양구에서의 시도는 제 예술 인생에서 전혀 새로운 장이 될 것입니다.”
현재 그는 기존에 작업해온 금속과 양구백토를 결합하는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도예는 금속과 달리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불에 맡겨야 하는 과정이 있어 제어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저는 지금 완전히 초보자로 돌아가 다시 배우는 중인데, 오히려 그 점이 저를 설레게 합니다. 금속을 다룰때도 잘 다치지 않는데 도예를 하면서 오히려 손을 더 많이 다쳤어요. 그만큼 양구에서의 시간은 제 예술 인생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의미있는 시간들이에요.”

■“예술은 인생의 방식”
데이비드 작가에게 예술 활동의 원동력을 물었다. “오랜 시간 예술에 몸담으며 깨달은 건 예술은 더 이상 직업이 아니라 인생의 방식이라는 것이에요. 창작의 모든 과정뿐 아니라 일상의 순간들이 영감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렇게 애정을 쏟아 완성된 작품들이 공개되는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라 관객의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리듯, 작품도 세상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하니까요.”
그의 작업은 말버러 갤러리 등 세계 전시장에 소개되며 국제적 반향을 일으켜왔다. 그런 그는 양구에서 백토를 빚으며 초보자로 돌아가 있다. “새로운 발견을 하며 제 자신을 다시 연구하는 과정”이라는 그의 말에는 이미 세계 무대에서 성취를 이룬 예술가의 겸손과 열정이 담겨 있다. 여기에 끊임없이 공부하고 스스로를 단련하려는 태도까지 더해져 양구에서의 시간은 또 하나의 성장 과정임을 보여준다. 금속과 빛으로 세계를 사로잡았던 조각가가 이제 백토라는 낯선 재료 앞에서 어떤 예술적 도약을 펼쳐낼지 기대를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