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일반

전쟁과 부상, 꿈 잃은 보스턴 챔피언 “그의 두 발은 멈췄지만 숨결은 아직 달린다”

강원일보 창간 80주년 특별기획 [1950 KOREAN WIN②]
함기용, 1950 세계 정상 올라 전 국민 환호, 귀국 직후 6·25 포연에 잊혀져
1952 올림픽 앞두고 의료사고로 다리 마비…세계 제패 2년 만에 은퇴 불운
모교 양정고 후배들 여전히 그의 꿈 계승, 중앙박물관 광복 80년 특별 전시
잊혀진 1950년의 세계 제패…광복 80년 맞아 다시 살아나는 이름 ‘함기용’

■전쟁도 꺾지못한 19세 챔피언의 꿈=1950년 4월19일 제54회 보스턴 마라톤을 2시간32분39초로 주파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청년 함기용은 단숨에 ‘한국 마라톤의 새로운 전설’로 떠올랐다.

열아홉 나이에 세계 정상에 오른 그는 손기정, 서윤복과 함께 한국 마라톤의 영광이자 국민들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온 나라는 그를 환영하는 환호로 가득했다.

하지만 귀국 직후 6·25전쟁이 발발했다. 영웅의 꿈은 전쟁터의 총성과 포연에 묻혔다.

그럼에도 함기용은 운동화를 벗지 않았다. 고려대에 입학한 그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대구에서 다시 훈련에 매달렸다.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함기용과 함께 송길윤, 최윤칠이 나란히 1~3위를 석권한 뒤, 서울 시내에서 열린 축하 퍼레이드 장면. 시민들은 ‘대한민국의 기적’이라 불린 세 영웅의 귀환을 환호하며 거리 곳곳을 가득 메웠다. 사진=양정고 제공

■스러진 올림픽의 꿈…세계 제패 2년 만 의료사고로 은퇴=하지만 함기용은 1952년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을 불과 보름 앞두고 허리 통증으로 찾은 병원에서 주사 치료 중 신경이 손상되는 의료 사고를 당했다. 허리부터 마비가 서서히 진행되더니 결국 오른쪽 다리를 완전히 쓰지 못하게 돼 그의 선수 생활은 겨우 21세의 나이에 막을 내렸다. 전쟁도 꺾지못한 19세 챔피언의 꿈은 허무하게 스러져갔다. 3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며 그는 “갑자기 멀쩡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몸이 망가져 버렸다. 다리 하나를 쓰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 미칠 지경이었다”고 회상했다. 긴 재활 끝에 걷는 일상은 되찾았지만 ‘보스턴의 영웅’은 다시 트랙 위에 설 수 없었다.

◇함기용의 모교인 서울 양정고 전경. 한국 마라톤의 전설이 첫 발을 내디뎠던 이곳은 지금도 그 정신을 이어가며 후배 선수들의 꿈을 키우고 있다.

■잊혀진 영웅을 계승하는 자=영광의 시간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많은 사람들이 함기용을 잊었지만 그의 숨결은 아직도 남아 있다.

지난 9월17일 찾은 서울 양정고교. 오래된 교정 한켠에 검은 비석 하나가 세월을 견딘 채 서 있다. 비바람에 닳은 표면 위로 정갈한 한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양정고 교정에 세워진 기념비. 제54회 보스턴마라톤 우승자 함기용(기록 2시간32분29초)을 비롯해 손기정 등 학교의 전설들이 남긴 세계 제패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第五十四回 보스톤 마라톤 優勝 記錄 二時間 三十二分 二十九秒 咸基鎔(제54회 보스턴마라톤 우승 기록 2시간32분29초 함기용)’

손기정과 함기용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이 비석은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양정의 자부심이자 한국 육상의 뿌리다.

김건한 양정고 육상부 감독은 “선배들이 이룬 훌륭한 업적을 후배들이 잊지 않고 있다. 아이들이 비석 앞을 지날 때마다 ‘우리가 이어가야 할 길이 있다’는 마음으로 훈련에 임한다. 우리 학교만의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구슬땀을 흘리며 달리는 양정고 육상부 선수들. 창단 당시의 전통 유니폼을 그대로 이어 입은 채, 선배들의 투혼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김태훈기자

가랑비가 내리던 오후 육상부 훈련장에는 흙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트랙에 물기가 고였지만 후배들은 한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는 스타팅 블록에 몸을 낮췄고, 누군가는 빗속을 뚫고 라인 끝까지 달렸다. 빗방울이 얼굴을 때려도 눈빛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양정고 주장 이재빈은 “우리에게 이 트랙은 선배님들이 달렸던 소중한 공간이다. 함기용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 받아 훌륭한 선수가 되고 싶기에 힘들어도 멈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건한 감독은 “양정은 대한민국 육상을 이끌어 온 학교”라며 “그만큼 이 이름을 이어간다는 책임감이 있다”고 강조했다.

◇강원일보 이동수 기자가 함기용 선수의 장남 함종규씨를 인터뷰 중이다. 김태훈기자

■교과서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이름=함기용의 장남 함종규(53)씨는 어린 시절 교과서 속에서 처음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을 떠올렸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함기용.’ 그때 처음으로 무뚝뚝한 아버지가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린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때의 자부심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0년, 종규씨는 태평양을 건너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보스턴을 찾았다. 보스턴 마라톤 협회 본관 한켠, ‘HAM KEE YONG, 1950’이라 새겨진 표석이 있었다. 한국 마라톤의 뿌리가 아직도 보스턴에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그는 “현지 관계자들이 ‘그는 전설이었다’고 말해줬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1950년 보스턴마라톤 우승 기념품. 함기용의 ‘우승 기념 배지’로, 한국 마라톤의 세계 제패 역사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광복 80년 다시 빛나는 이름 ‘함기용’=K-컬처와 달리기 붐 속에 함기용의 이름은 다시 빛나고 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은 광복 80주년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 특별전시를 열고 있다. 전시관 한켠에는 1950년 보스턴마라톤 우승 기념 배지에는 ‘Badge for the Winner of the 1950 Boston Marathon’이라는 문구가 영광스런 빛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기자가 만난 몇몇 관람객은 함기용에 대해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했다. 시간이 역사 속으로 밀어 넣은 함기용을 강원일보가 다시 소환한 이유다.

아들 함종규씨는 “나라 전체가 들썩일 만큼 큰 환영을 받았지만 곧이어 터진 전쟁이 모든 걸 삼켜버렸다.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다는 게 늘 안타깝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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