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하늘은 유난히 깊고 푸르다. 여름의 짙은 습기가 걷히고 겨울의 삭풍이 아직 다다르지 않은 그 사이에 펼쳐지는 ‘투명한 푸름’은 세상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고요한 틈이며, 마음 깊은 곳까지 맑아지는 계절의 숨결이다. 잊고 살던 창문 밖을 시나브로 올려다보게 하고, 멈춰 선 걸음을 하늘에 붙잡아 두게 한다. 결국 가을 하늘이란, 우리가 잊고 지내던 ‘위’의 세계를 다시금 환기시키는 자연의 화두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행위는 단순한 동작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안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작아진 시선을 넓히는 일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하늘을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이치와 도리의 근원으로 여겼다. 하늘을 본다는 건 단지 시선을 드는 일이 아니다. 속 좁은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 전체를 바라보는 일, 곧 앉은 자리의 욕망을 넘는 일이다. 가을 하늘의 푸름은 바로 그 초월의 시야를 닮았다. 수천 겹의 생각이 걷히고 마음 한가운데 맑은 여백이 생긴다. 세상이 여전히 복잡해도, 이 하늘 아래선 인간이 작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푸름 속에서 제 크기를 되찾는다. ▼그러나 이토록 맑은 하늘을 마주하고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탁하다. 정치권은 공방으로 잿빛이고, 민심은 얕은 계산으로 흐려진다. 각자의 시선은 서로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바닥난 이익만을 좇는다. 허공을 바라볼 줄 모르면 결국 눈앞의 흙탕물에만 갇히게 된다. 가을 하늘처럼 투명한 시선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이유다. 성급한 말보다 침묵이, 대결보다 이해가 더 멀리 보이는 때임을 하늘은 묵묵히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낮아 보일수록 사람이 작아진 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를 눌러버린 탓이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여전히 그 하늘은 그 자리에 있다. 너무 푸르러 마음이 먹먹한 그 하늘을, 잠시만이라도 올려다보자. 삶은 결코 한 줄의 뉴스처럼 짧고 피상적이지 않다. 다만, 바라보는 높이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질 뿐이다. 푸름을 품은 시선만이, 탁한 세상에서도 길을 찾아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