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숙종의 결단으로 노산군은 마침내 ‘단종’이라는 이름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명예 회복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복위는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 의례를 통해 비로소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왕의 부묘 의례는 국상(國喪)이 끝난 뒤 혼전(魂殿·임시 안치소)에 모시던 신주를 종묘로 옮기는 과정이다. 그러나 단종의 경우는 전례가 없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241년 전에 세상을 떠난 왕이었기 때문에, 종묘에 모실 신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산군으로 강등돼 유배지에서 죽은 사람이었으니, 애초에 신주가 만들어질 이유도 없었다.
이 때문에 복위부묘도감 산하에는 ‘신주조성청(神主造成廳)’이라는 특별한 부서가 설치되기도 했다. 의궤의 도청 기록에 따르면, 12월 21일 밤나무를 깎아 단종과 정순왕후의 신주를 새롭게 조성했다. 이어 25일 시민당(時敏堂)으로 신주를 옮겨 모신 뒤, 숙종이 직접 행차해 신주에 글씨를 쓰는 개제(改題) 의식을 거행했다. 241년 동안 구천을 떠돌던 영혼이 마침내 국가가 공인한 신성한 상징물로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신주와 함께 왕의 공덕을 기리는 옥책(玉冊)도 새롭게 제작됐다. 옥책은 옥조각을 엮어 만든 책으로,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핵심 기물이다. 단종정순왕후복위부묘도감의궤의 삼방(三房) 기록에는 당대 최고 문장가들이 지은 옥책문 전문이 수록돼 있다.
영중추부사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단종대왕 옥책문과 우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지은 정순왕후 옥책문은, 241년의 억울함을 씻어내고 왕실의 정통성을 다시 세우려는 문장의 힘이 결집된 결과물이다. 비극적인 죽음과 기나긴 유배 생활의 한(恨)을 정제된 국가의 언어로 승화시켜, 단종 부부를 완전한 조선의 국왕과 왕비로 복원해 낸 것이다.
12월 27일, 마침내 신주가 종묘를 향해 출발했다. 의궤 권말에 수록된 22면의 채색 반차도(班次圖)는 이 장엄한 행렬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반차도를 보면 선두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각종 의장기가 펄럭이고, 그 뒤를 이어 옥책과 금보를 실은 가마가 따른다. 행렬의 중심에는 단종의 신주를 모신 신여(神轝)와 정순왕후의 신여가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후위 군사들이 이를 호위한다.
장엄한 행렬을 거쳐 단종과 정순왕후의 신주가 안착한 곳은 종묘의 정전(正殿)이 아닌 영녕전(永寧殿)이었다. 조선의 종묘 제도는 왕위 계승 기준으로 5대가 지난 조상의 신주를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는 원칙을 따랐다.
복위가 이루어진 1698년은 이미 단종(6대)으로부터 숙종(19대)에 이르기까지 13대 이상이 지난 시점이었다. 따라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 서협(西夾) 제7실에 봉안됐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윗 방인 제6실이 아버지 문종대왕의 자리라는 것이다. 살아서는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비참하게 죽어간 아들이, 241년 만에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된 셈이다.
이날 숙종은 직접 종묘에 나아가 부묘례(祔廟禮·3년상이 끝난 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를 거행했다. 이로써 1457년 영월에서 시작된 비극은 1698년 종묘 영녕전에서 국가의 공식적인 애도와 복권으로 마침표를 찍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