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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의 바다편지]사천, 시와 정치, 그리고 시인 김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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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 시인

‘파초’의 시인 김동명은 1900년에 태어났습니다. 1900년은 19세기의 마지막 해이자, 20세기의 여명을 품고 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김동명이 1902년생인 김소월보다 두 해나 빨리 태어났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인의 대표작인 ‘파초’  ‘수선화’ ‘내 마음’ 등이 소학교 제자인 작곡가 김동진에 의해 세련된 가곡으로 만들어져 널리 알려진 탓도 있습니다.

김동명의 시와 생애는 세기의 교체기가 품고 있는 기운만큼이나 역동적이었습니다. 그는 격동기를 헤쳐나가며 시인, 교육자, 정치평론가로서 일가를 이루었을 뿐만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참의원에 선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대선거구제로 총 6명을 뽑는 서울 참의원 선거에 나가 26명의 출마자 중 3위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 이후 만들어진 양원제 국회는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해산되어 김동명의 참의원 활동은 9개월 만에 끝나게 됩니다.

시인 김동명이 정치에 뛰어든 것은 8·15 광복이 기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마지막에는 절필로써 일제에 항거하였습니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로 시작하는 대표작 ‘파초’는 이러한 인고의 시절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광복을 맞이하자 마치 준비가 되었다는 듯 역사의 무대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때 발표한 연작시 ‘새 나라의 구도’  ‘새 나라의 일꾼’  ‘새 나라의 환상’ 등은 제목에서부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설렘이 느껴집니다. 광복 이전에 시인의 무대가 자연의 세계였다면, 광복 이후의 무대는 인간이 직접 참여하는 역사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북에서 조만식이 이끌던 조선민주당 함남도당위원장 자리까지 올랐으나 당시 소련 군정하 공산당 세력의 위협을 받아 월남하게 됩니다. 이후 동아일보에 정치 평론을 발표하며 독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고, 이 호응이 참의원 선거에서의 높은 득표율로 이어졌습니다.

사자후에 가까운 시인의 정치 평론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울립니다. “우리가 인민을 위한다는 것은, 단지 혀로만 위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오, 진실로 인민이 바라는 것, 인민이 반드시 가져야 되는 것, 인민이 목마르게 찾는 것, 이런 것들을 직접 인민의 소리를 통하여 듣고, 인민의 마음을 마음으로 느낌으로써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바쳐 봉사하는 행위를 말함이다.”(정치하는 마음의 기본자세) 시인의 장남 김병우는 아버지가 걸었던 정치의 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정치 현실을 비판적으로 대하고 논설의 붓을 들었을 때나 정치의 현장에 투신했을 때도 기본적으로 아버지는 시인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저는 적어도 아버지에게서는 논설을 쓰는 일도 정치 행위도 본질적으로 시작(詩作)의 행위였다고 봅니다.” (아버지의 초상) 철학과 교수를 역임한 김병우는 여러 글을 통해 아버지의 초상을 섬세하고도 깊이 있게 그려냈는데 그가 도달한 결론은 아버지가 걸었던 길은 궁극적으로 시인의 길로 수렴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동명의 시와 삶에서 ‘시와 정치’ ‘시인과 정치인’의 길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김동명 시인이 태어난 곳은, 강릉의 사천해변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자리한 사천면 노동리입니다. 현재 ‘김동명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고, 문학관에서 산길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시인이 안장된 경주 김씨 종중의 납골묘역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갈하게 단장된 이 묘역에는 이제는 강릉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훤칠하게 잘 자란 ‘파초’가 서 있습니다. 이 터는 시인이 유년기에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던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시인이 여섯 살 때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던 산 마루턱도 나옵니다. 격동기를 헤쳐나가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와 정치의 길을 물었던 시인이, 평생 좋아한 바다를 볼 수 있는 유년기의 양지바른 언덕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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