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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칼럼]인공지능 시대와 신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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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 강원대학교 교수

인공지능 시대가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다가온 느낌이 든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공지능 분야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만큼 빠르고 편폭이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챗지피티나 제미나이를 통해서 손쉽게 정보를 검색하고 확인할 뿐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기본적인 작업을 쉽게 해내는 경향은 우리 주변에서도 상당히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옆에 앉아서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미래를 향해 함께 가자는 것인지 자신이 그리는 미래를 향해 가야만 한다는 협박인지는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다가올 미래를 장밋빛으로 채색하면서 유토피아가 더욱 가까워진 것처럼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암울한 미래를 그리면서 디스토피아의 도래를 점치기도 한다.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서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은 어쩌면 인류사의 격변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의 파고(波高)가 높기도 하지만 전방위적으로 우리 앞에 느닷없이 닥쳤기 때문에 판단중지 수준의 혼란이 동시에 우리를 강타한 것이다. 발전 속도를 고려한다면 조만간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달라지리라는 것은 그 분야의 전문가라면 누구나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다.

올해 초 중국에서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무대에 등장해서 인간과 함께 쿵푸 솜씨를 뽐내더니, 서울 거리에서는 초파일 제등행렬에 로봇 스님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큰 울림을 선사했다. 간단한 수준의 공장형 로봇이나 로봇개를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이들의 존재는 인공지능 기반의 로봇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실 로봇의 움직임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컴퓨터의 조작을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봇이 팔로 컵을 하나 잡는 것에도 무수히 많은 계산식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0과 1로 구성된 컴퓨터의 간단한 숫자가 설명하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이렇게 복잡한 계산식을 처리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팔로 컵을 잡는 행위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식이 소요될 것이며, 그것을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능력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정밀함 앞에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능력이란 참으로 하찮아 보이기까지 한다. 이미 어떤 분야에서는 컴퓨터의 능력을 인간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지리라는 점은 당연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신체성이라고 하는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 초여름 푸른 하늘을 보면서 강변을 걷노라면 슬며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뺨을 스친다. 그 순간 나는 살아있다는 감각과 함께 완연한 여름이라는 점을 단박에 이해한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감각을 나는 어떻게 느끼는 것일까. 물론 뇌과학이나 신경학 등 여러 분야의 지식으로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구조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한들 내가 지금 느끼는 산들바람의 부드러움과 싱그러움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을 우리는 신체성(身體性)이라고 지칭한다. 엄청난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과 비교할 때 인간의 특이점은 바로 신체성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그들이 인간을 완전히 넘어서기 위해서는 신체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물론 세월이 흘러서 언젠가는 로봇도 신체성을 가질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논리를 앞세운 예측에 불과하다. 아무리 뛰어난 로봇이라 해도 그들에게 바람이 분다는 것은 그저 대기의 흐름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일 뿐 우리가 가지는 복잡다단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고 우리의 환경이 완전히 달라지더라도 인간이 가지는 신체성은 어떤 것으로도 넘기 어려운 지점이다. 희로애락의 무한한 감정이 얽히면서 삶과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어떤 새로운 기술이 우리 앞에 닥치더라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그저 몸을 통해서 신체적 경험을 꾸준히 쌓아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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