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동방의 빛, 비단길 넘어 유럽 비추다
지난날 나의 외국생활을 돌이켜 보면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에서 외교관으로 살았든 3년 기간은 일생을 두고 기억될 만한 좋은 여행을 많이 했든 시기였든 것 같다. 실크로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타시켄트를 품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에 살면서 시간을 쪼개어 주변의 실크로드 자국들을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페르가나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여행할 수 있었든 것은 지금 생각하니 행운 이였다. 당나라 장안(오늘의 서안)에서 시작하여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이르는 장장 1만 Km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한 가운데 우즈베키스탄이 있다. 한 없이 멀고 먼 비단길 실크로드는 사막과 초원을 지나 험준한 산악과 고원과 협곡을 지나면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지만 천산을 넘어 중앙아시아를 지나는 길이 가장 실크로드답다. 이 길은 상인들이 오고 가며 좌판을 벌린 길이였을 뿐 아니라 동서의 종교와 문화가 교차한 길이며 제국들의 무력이 부딪친 길이였기 때문이다.
-고선지 장군의 중앙아시아 원정
실크로드의 전성기는 아마도 중국의 당나라 때가 아닌가 싶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서역의 옥과 중국의 비단이 교류된 증거가 있지만 춘추 전국시대 한 무제가 이 교역로에 관심을 보이면서 왕래의 빈도는 증가하였다. 그러나 7세기 중반 당나라가 서역 변방 타림분지에 안서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실크로드는 전성기를 맞았다. 동방의 중국인 북방의 유목민 남방의 티베트인들이 교역을 통하여 이익을 남기게 되자 교역로가 통과하는 나라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으며 군사력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슬람을 믿는 아랍인들의 동진과 서역을 지배하려는 중국세력은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부딪치게 되었다. 당나라 현종은 서쪽으로부터 파미르고원을 넘어 출현하는 아랍인들을 자주 정벌하여 오던 차에 험준한 천산과 파미르고원을 넘는 대규모 중앙아시아지역 원정을 감행하였다. 원정을 이끈 장수는 바로 고구려 유민 출신의 젊은 고선지(高仙芝)장군이었다. 그는 현종의 총애를 받아 이미 천산을 넘는 원정에 두 번이나 나선 일이 있었다. 그의 세 번째 원정이자 마지막 원정은 751년 타쉬켄트 부근 탈루스(Talus)강 회전이었다. 그러나 그의 7만 대군은 아랍-투르크 연합군에게 패퇴함으로서 중국은 영원히 천산 넘어 서역으로의 꿈을 접게 되었다. 아랍은 이후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신장지역까지 넓은 지역을 이슬람 화 하였다. 서방에 종이 만드는 기술이 전해진 것도 당나라의 이 서역원정 때이다.
-이슬람 실크로드 타고 동방으로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755년)을 겪고 티베트 군이 진출함에 따라 교역로를 차단당하게 되니 북방 유목민 투르크(돌궐)족이 남진하여 동서 투르키스탄으로 갈라지면서 중앙아시아는 서 투르키스탄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츠스탄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그리고 중국의 서부 신장은 동 투르키스탄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족)으로 분할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이슬람 화되었다. ‘스탄’ (Stan)은 이슬람 화된 나라에 공통으로 붙는 '땅' 이란 뜻이다. 이렇듯 실크로드는 이슬람세계에는 동방진출을 도와준 1등 공신인 셈이다. 7세기 초 아라비아반도 홍해 연안의 메카에서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는 서기 650년 그의 후계자들이 코란을 집대성하면서 삽시간에 인근의 페르시아와 중동 (633-664년) 그리고 북아프리카 스페인으로 서진하였으며 (711년) 동북으로 중앙아시아 (751년) 동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에까지 (15~16세기) 번창하였다. 11~12세기 십자군 전쟁으로 시련을 겪은 소아시아지역에서는 오스만터키(1299년)가 부흥하면서 비잔틴제국을 무너트리고(1453년) 발칸반도 여러 나라에까지 이슬람을 확대하였다. 특히 중앙아시아로의 전파는 실크로드를 타고 이란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츠스탄 타지키스탄을 거쳐 파미르고원과 천산을 넘어 중국 신장 지방에까지 이르렀으며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는 아랍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마호메트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집대성한 쿠란은 모두 네 권이 필사본으로 양가죽에 쓰여 졌는데 그 중 하나가 타시켄트의 구시가 바락 칸 이슬람 성원의 별채에 보관되어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1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패자가된 티무르가 바그다드를 공략하고 남부도시 바스라에서 노획물로 사마르칸트에 가져 온 것이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이탈리아의 마르코폴로는 동방무역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소아시아반도(터키)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르고원 중국신장을 건너 1275년 몽고의 수도 샹두에 이르는 육로 대장정을
여행했었다. 그는 징기스칸의 손자이며 원나라를 건설했던 원세조(쿠빌라이)의 환대를 받았으며 서양문물에 관심을 보였던 원세조는 그를 관직에까지 오르게 하였다. 그는 17년간 중국에 머물면서 황실로부터 여러가지 임무를 받고 티벳 미얀마 등 중국 곳곳을 여행하였다. 그 후 그는 몽고부족 일 한(Il Khan 이란지역)국으로 시집가는 원나라의 공주를 호송하여 인도양 해로를 항해 끝에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 해협에 도달하였으며 이탈리아에 귀국하여서는 베니스-밀라노 전쟁에 포로가 되어 옥살이를 하면서 ‘동방견문록’을 남겨 유럽에 동양문물을 소개하는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 그의 기행문은 몽골의 침략으로 동방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동방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2세기 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마르코폴로의 기행문이 일으킨 동방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중국대륙을 찾아 떠나려 했던 많은 유럽 항해가 들의 꿈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은 또한 19세기 초 중국과 한반도에서 각축했던 열강들의 세력다툼의 길잡이가 된 셈이었다. 이렇듯 마르코폴로가 이탈리아에서 중국까지 걸어왔던 길은 기원전부터 동서 문물이 오고 간 실크로드였으며 16세기 이후 인도양을 거치는 항로가 트이기 전까지는 동서 교역의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최영하·본보 독자위원장·前 우즈벡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