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청나라에 맞서 남한산성 44일…인조는 끝내 9번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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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 (연세대 겸임교수)

◇가평 조종암 만절필동 재조전방. 사진=경기도청 제공

청나라에 맞서 남한산성 44일…인조는 끝내 9번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의 명나라 숭배 고집 등 원인

청나라 병자년 재차 조선 기습 침공

조선 인조 남한산성서 포위당해

추위·식량부족에 끝내 삼전도 굴욕

# 정묘년 조선을 침공하다

1627(정묘)년 조선을 침공한 아이신고로 아민의 3만 후금군(後軍)은 아민의 라이벌 대칸 홍타이지(청 태종)의 의향은 물론 명나라군과 차하르 몽골군의 동향도 염두에 두면서 움직였다. 산하이관의 명나라 장군 원숭환과 조선, 차하르 몽골의 협공을 우려한 후금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에 억류돼 있던 강홍립이 조선과 후금 사이를 중재했다. 온건한 내용의 조약이 체결됐다. ①후금군은 즉시 철군하며 ②철군 후 다시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③후금-조선은 형제관계로 하며 ④조선은 후금과 맹약을 맺되 명나라와는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였다. 정묘호란 얼마 후 서인 정권은 “조선군의 배신으로 인해 명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패했으며, 강홍립이 호란(胡亂)을 야기했다”고 강변했다.

1630년 명(明) 최후 황제 숭정제는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넘어가 대들보인 국방장관 겸 군총사령관 원숭환을 책형(?刑)에 처했다. 그 한 해 전인 1629년 황제 기망(欺罔)과 부패 혐의로 원숭환에게 참형당했던 모문룡의 부하 공유덕, 경중명 등은 1631년 반란을 일으켜 산둥성 덩저우를 점령한 다음 진을 쳤다. 총병 조대필에게 패해 서한만 여기저기로 도망 다니던 이들은 1633년 5월 서한만의 장쯔다오(獐子島)로 들어갔다. 가도의 명나라 장군 심세괴와 조선 해군이 협공해 오자 궁지에 몰린 이들은 1만4,000명이 넘는 병력과 185척의 전함(戰艦), 30문(門)의 홍이(포르투갈)대포를 갖고 후금에 투항했다. 홍타이지는 수도 선양성 밖까지 나와 이들을 포옹할 정도로 환대했다. 조선은 명의 요구에 따라 해군을 동원해 공유덕, 경중명군을 추격하고, 이들을 호위하러 나온 후금군과도 싸웠다. 신형 함선과 홍이대포를 확보한 후금은 그해 6월 홍타이지의 조카 요토가 지휘한 1만 병력으로 하여금 랴오둥반도 최남단 명나라 군항 뤼순을 점령하게 했다. 뤼순 함락은 명은 물론 조선과 심세괴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도피해도 더는 안전하지 않게 됐다. 양질의 해군과 대포를 확보한 후금은 산하이관을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홍타이지는 명나라를 큰 나무에 비유하고, 좌·우의 몽골과 조선을 찍어버리면 명나라는 저절로 쓰러질 것이라고 종종 말했다. 홍타이지는 1635년 이복동생 도르곤으로 하여금 몽골 투메트부 알탄칸(1507~1582년)이 도읍했던 네이멍구 후허하오터까지 원정케 했다. 후금은 몽골 대칸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차하르부를 복속시켰다. 대분열 시대의 몽골은 후금의 공세 앞에 무기력했다. 홍타이지는 1636년(병자년)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다.

# 병자년 또다시 조선을 넘보다

홍타이지는 조선 원정을 준비해 놓고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황제에 등극한 자신을 섬길 것을 요구했다.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지금으로부터 385년 전인 그해(음력 1636년) 12월8일 홍타이지가 이끄는 한족, 몽골족, 조선인이 포함된 4만5,000 청나라 서로군 본대가 얼어붙은 압록강(Yalu Ula)을 건넜다. 기습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 기습이 성공하지 못하면, 식량 부족 포함 경제난으로 인해 나라 자체가 와해될지도 모를 상황에 처해 있었다. 도르곤이 이끄는 동로군 별동대는 평안도-함경남도-황해도 지역을 약탈, 군량을 조달했다. 조선인 병사를 앞세운 요토의 선봉부대는 1일 90㎞ 속도로 남하했다. 황해도 황주에 주둔하던 도원수 김자점의 5,000여 병력은 청군과 소규모 전투를 치르면서 양평까지 남하, 인조를 구원코자 했으나 청군 저지선에 막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한산성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청군 전위부대 300기가 12월14일 홍제(녹번)역에 진입했다. 잇달아 도착한 청군 기병대는 마포나루와 김포반도 등 강화도로 들어가는 모든 길목을 차단했다. 사신으로 파견된 최명길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인조를 구원하고자 경상 좌·우병사 허완과 민영이 9,000여명의 병사(속오군)와 함께 북상했다. 선발대 2,000여명이 1637년 1월 1일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도착했다. 이어 본대 7,000~7,500명도 도착, 쌍령 양측에 진을 치고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1월3일 요토가 지휘하는 5,000여기의 청군이 곤지암을 점령한 뒤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고자 33기로 구성된 척후대를 쌍령으로 보냈다. 밤새 이동하여 조선군이 주둔한 산 위에 진을 친 청나라군이 산을 타고 내려와 허완 부대 목책에 다다르자 놀란 조선군은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발포했다. 능숙하지 못한 병사가 다수였던 조선군은 첫 발포에서 소지하고 있던 탄환을 거의 소진해 버렸다. 조선군 진영은 탄환 보급을 요구하는 병사들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청군 30여 기(騎)가 조선군 목책을 넘어 급습했으며, 허완 부대의 조선군은 무질서하게 도주했다.

반대쪽 민영 부대는 그런대로 잘 대응했으나, 분배를 위해 진영 한가운데 모아 놓았던 화약이 조총의 불꽃에 닿아 폭발하고 말았다. 탄약을 보급하던 지휘관과 군사 몇 명이 폭사했다. 폭음에 놀란 조선군이 우왕좌왕했다. 청군 300여 기가 돌진해 조선군을 짓뭉갰다. 나머지 청군도 조선군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허완과 민영 포함 수천 명의 조선군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때의 ①칠천량 해전과 ②광교(용인)전투 ③6·25전쟁 때의 현리전투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 4대 패전의 하나인 ‘쌍령 전투'다.

# 한국 근현대사 4대 패전 ‘쌍령 전투'

쌍령 전투를 전후해 여타 지방 근왕병 모두 무너졌다. 전라병사 김준룡이 지휘한 1월 6일 용인 광교산 전투 승리와 평안병사 유림이 지휘한 1월28일 김화전투 승리는 대국(大局)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쌍령 전투 이후 인조를 구원할 병력은 사실상 조선 어디에도 없게 됐다. 1937년 1월22일 봉림대군(효종) 등이 도피해 있던 강화도가 조선 서해안에 살고 있던 여진족 출신 어부들의 인도를 받은 도르곤의 청군에게 함락당했다. 명 해군이 산둥반도를 출발하기 전이었다. 남한산성에서는 최명길 주도 주화파와 김상헌 주도 척화파가 소모전을 벌였다.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 속에 남한산성에서 44일을 버티던 인조는 1월27일 한강 가 삼전도(三田渡)에 나가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인조는 중국 황제가 아니라 만주 황제 겸 북원(北元) 대칸인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청군은 천연두 확산 가능성도 있었던 관계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포함 10만여명의 조선인 포로를 끌고 신속히 철군했다. 청나라는 당초 계획과 달리 조선에게 변발(?髮) 등 습속 변경을 요구하지도 못했다. 700만 인구의 조선이 150~200만 인구의 청에게 속절없이 당했다. 청나라 핵심인 건주여진 오도리부는 15세기까지만 해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힘없이 굴복하던 여진 1개 부락에 불과했다. 조선은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대를 이어 노비가 되는 나라였다. 나라 자체를 빼앗기게 되는 한족의 명나라보다는 나은 처지라고 할까? 인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인조 이후 조선 왕의 시호(諡號)는 조·종(祖宗)에서 왕(王)으로 격하됐다. 청나라가 내려준 16대 인조의 시호는 장목왕, 17대 효종은 충선왕, 18대 현종은 장각왕, 19대 숙종은 희순왕, 20대 경종은 각공왕, 21대 영조는 장순왕, 22대 정조는 공선왕, 23대 순조는 선각왕, 추존왕 익종은 강목왕, 24대 헌종은 장숙왕, 25대 철종은 충경왕이다.

# 병자호란 발생 원인은

병자호란 발생 원인은 다양하다. 첫째,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이 해군 함선과 함께 홍이대포를 갖고 만주에 투항하고, 몽골 차하르부도 만주에 정복당함으로써 동북아 군사균형이 청에 유리하게 변했다. 둘째, 청과 조선 모두 정묘조약을 어겼다. 특히 청은 조선에게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고치자고 하는 것 외에 대규모 병력, 함선과 함께 다량의 물자 공급도 요구했다. 종종 국경지역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셋째, 모문룡의 가도 주둔과 명나라 랴오둥 총사령관 웅정필(원숭환의 전임)의 삼방포치책(①명나라 산하이관 육군, ②보하이만 해군, ③조선군으로 만주군 상대)에서도 알 수 있듯 명나라는 어떻게 하든 조선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넷째, 홍타이지가 칭기즈칸-다얀칸의 직계 차하르부 릭단칸으로부터 대원옥새(大元玉璽)를 확보함으로써 만주 2대 황제(숭덕제)인 동시에 원(元) 41대 대칸(바얀 체첸 칸)으로도 즉위해 제국 건설의 정치적 명분을 얻었다. 청나라는 중국 왕조가 아니라 중국과 만주, 몽골, 티베트 등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대제국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몽골 △타이완 △(티베트) 그리고 △1930년대 세워졌던 위성국가 만주국 등은 청나라의 잔해 위에서 태어난 나라들이다. 다섯째, 가장 핵심적으로는 황제와 대칸을 동시에 칭한 청의 세계관과 명을 종주국으로 받든 조선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한 서인 세력은 명나라 숭배를 고집했다.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삼학사 가운데 윤집은 척화론(斥和論)으로 유명하다. 그의 조국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였다. 그는 “만주는 우리 부모 명나라의 원수입니다. 신하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돼 부모를 버리겠습니까?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명과의 의리는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조선 일반 백성들도 만주족을 오랑캐로 여겨 멸시했다. 조선이 본받아야 할 문명국가로 명나라를 지목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필수 교과서로 지정한 서당은 물론 서원 교육도 중화숭배론으로 점철됐기 때문이다. 조선에는 ‘호운불백년(胡運不百年)', 즉 ‘만주족 청나라는 몽골족 원나라와 같이 100년을 못 갈 것이다.'라는 기대 섞인 주장이 횡행했다. 두 번의 호란(胡亂) 이후 나온 ‘박씨전'과 ‘유충렬전', ‘조웅전', ‘장익성전', ‘신유복전'에는 조선인의 만주와 몽골, 티베트 등 비한족(非漢族)에 대한 적개심과 중화존숭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유충렬전', ‘조웅전', ‘장익성전', ‘신유복전'의 주요 무대는 중국이고, 주인공들 모두 중국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다. 만주나 몽골(달단), 티베트(서번)는 오랑캐로 나온다. 김만중의 ‘구운몽' 무대도 중국이다. 북학파의 대표로 ‘열하일기' 저자이기도 한 박지원조차 출신 당파인 노론의 당론(黨論)에 따라 “효종의 임금은 명나라 천자이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효종에게 하듯이 명나라 천자에게 충성을 다했고, 우리는 명나라 유민이다.”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은 조선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국시(國是)이자 국가윤리였다.

# 300여년 흘러 다시 ‘만절필동'

조선 성리학자들은 명나라가 망한지 1갑자(60년)되는 1704년 속리산 화양계곡에 ‘재조지은'을 되새기는 만동묘를 세웠다. 숙종은 같은 해 창덕궁 후원 으슥한 곳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비밀리에 명나라 황제 제사를 지냈다. ‘개혁군주' 정조는 ‘만절필동(萬折必東) 그 정성 힘써 따라 나가리(萬折餘誠志事遵)'라는 시를 짓고, ‘실학자' 정약용은 ‘명나라에 충성하자'는 요지의 답사(答辭)를 썼다. 그로부터 313년이 지난 2017년 12월 노영민 주중국 대사는 신임장 제정식 방명록에 ‘萬折必東'을 쓰고, 2년 뒤인 2019년 2월 문희상 국회의장은 미국 하원의장에게 손수 한자로 쓴 ‘萬折必東' 휘호를 선물했다.

편집=김형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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