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약차주 채무조정에 '125조원+@' 긴급 투입
역대 금융 포퓰리즘성 정책 평가 '언 발에 오줌 누기'
잘못된 선례 반복되지 않도록 준비 철저히 해야
정부가 최근 제2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소상공인·가계·청년·서민 등을 대상으로 한 ‘125조원+a''의 역대급 채무 탕감 패키지를 내놨다. 금리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면서 차주들의 빚 부담이 늘어나자 정부가 긴급 재원을 투입하며 ‘급한 불 끄기''에 나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여기에는 주식, 코인 등 투자로 손실을 본 저신용 청년들을 위한 ‘청년특례 채무조정 제도''를 신설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만 34세 이하 신용평점 하위 20% 청년들을 대상으로 채무 정도에 따라 이자를 30~50% 감면하고, 최대 3년간 원금 상환을 유예하며 해당 기간 이자율을 3.25%로 유지하는 것이 골자다. 이를 두고 부실차주 및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빚투(빚내서 투자)''족까지 구제해줌으로써 차주의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를 불러일으키고, 역차별과 불공정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어지고 있다.
선심성 복지는 진통제일 뿐
빚 탕감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반복돼 온 대표적인 금융 포퓰리즘성 정책이다. 직전 문재인 정부는 장기 소액 연체자 80만명의 빚을 전액 탕감해주기로 해 논란을 빚었다. 박근혜 정부때는 원리금 50%(기초생활자 70%) 탕감, 나머지 저금리 장기분할상환, 다중채무자 포함 322만명 대상 총 18조원 규모의 서민 채무 탕감대책을 내놨다. 이명박 정부 때는 채무 500만원 이하 생계형 신용불량자 연체기록 말소, 신용등급 7, 8급까지 채무를 재조정해주겠다고 역대 최대 규모인 총 720만명에 대해 대사면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역대 정부의 빚 탕감대책은 실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을까. 결론부터 밝히자면 그동안의 탕감책은 취지에 비해 효과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히려 가장 큰 문제는 빚을 성실히 갚고 있는 이들의 박탈감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힘들면 빚을 정부가 대신 갚아 준다''는 그릇된 메시지가 확산돼 모럴해저드를 부추길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빚 탕감책은 있었다. 여러 왕이 가뭄 등으로 궁색해진 백성의 부채를 탕감한 기록이 가끔 나온다. 왕조실록 세종편(1439년)에는 지금의 감사원인 사헌부가 ‘어리석은 백성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부채를 탕감해주지 말라''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불가피한 지원일지라도 적정 수준에 그쳐야 한다. 물론 이번 정부의 채무 조정은 코로나 사태라는 국가적 재난에 이어 고금리·고물가 등 금융 환경의 악화로 궁지에 몰린 취약계층에 대한 선제적 지원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당국이 발 빠르게 대책을 내놓은 것도 고무적이다. 하지만 지원책 마련에만 매달린 나머지 부작용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 때문에 ‘청년층 표심을 겨냥한 포퓰리즘''이라는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선의의 지원제도가 ‘빌린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다면 우리 사회의 신용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선심성 복지는 일시적인 진통제는 될 수 있어도 근본적인 처방전은 될 수 없다.
가계부채 갈수록 증가 추세
무엇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강도 높은 시혜성 정책이 반복된다면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은 더 커진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는 1,800조원이 넘는다. 또 올 3월 말 기준 금융권의 가계대출 차주(대출받은 사람)는 1,646만명이다. 더욱이 연말까지 기준금리가 3.0%까지 오를 전망이다. 기준금리 1% 인상에 연간 약 14조원의 이자 부담이 늘어난다. 금융권 채무를 갚지 못하는 사람은 앞으로 더 증가할 수 있다. 자칫 ‘돈을 갚지 않으면 내 빚도 정부가 탕감해 주겠지''라는 비정상적 기대를 할 수 있는 여건이다. 당장 고생해 돈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인식만 심어줄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국민 혈세를 투입하는 것인 만큼 모두에게 부담이 전가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꼬박꼬박 빚을 갚아 나가는 성실한 채무자가 바보가 될 수 있다. 빚 탕감 정책은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것이니만큼 잘못된 선례를 남기지 않도록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빚 탕감 정책에 그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