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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 "제2의 을미사면" 육영수 여사 죽음에 반일 감정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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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육영수 자격 사건

광복절은 일제의 폭압으로부터 전 국민이 해방의 기쁨을 나눴던 날이다.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은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 저녁 미수사건 혹은 육영수 저격 사건이라고 불리는 참극은 1974년 8월15일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벌어졌다.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통령 박정희가 경축사를 하던 도중, 청중석에 있던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쏜 총에 의해 영부인 육영수여사가 맞아 사망일이 발생했다. 당시 문세광의 본래 목적은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었으나 박정희가 방탄 연설대 아래로 몸을 피하여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총탄을 머리에 맞은 육영수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후 뇌수술을 받았으나 이날 오후 7시께 향년 48세로 사망했다. 이날 사망자는 육영수 여사와 합창단으로 현장에 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여학생 둘도 있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중앙정보부로 압송됐다. 수사 결과, 위조 여권을 이용해 밀입국한 문세광은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탈취한 권총을 범행에 사용했고, 일본인 공범이 있었다는 것 등이 밝혀졌다. 우리 정부는 일본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일본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한일관계가 불편해졌다. 9월 19일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며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부총재인 시나 에쓰사부로가 수상 다나카의 친서를 휴대하고 진사특사로 한국을 다녀간 이후 양국 관계 개선되었는데,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양국외교 관계에 있어서 공세적이었던 일본은 이 사건으로 인해 수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일 감정은 고조됐다.

23살 청년 문세광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해 독재정권을 무너트리면 분노한 국민이 일어나 민주화가 되고 자신은 영웅이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세광의 저격사건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또 다시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자며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제2의 을미사변이라고 불렀다. 일본 대사관에 몰려가 항의하고 반일 감정이 절정에 이르렀다. 전국에서 일본과 북한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문세광은 오사카 빈민촌 출신으로 학교에서는 일본인에게 맞고, 가게에서는 조선인 사절, 취직도 안 되는 등 각종 차별과 천대에 시달렸다. 여기에 저격사건 1년 전 일본에서 벌어진 김대중 전대통령 납치사건으로 재일교포를 향한 차별이 더 심해졌다.

문세광은 내란목적살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 6가지 죄목을 적용해 사건 발생 4달 만에 사형 확정, 3일 만에 집행됐다.

당시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6-7발의 총성이 울렸지만 문세광은 4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4방은 각각 의자, 연설대, 태극기, 천장에 맞았다. 30년 후 드러난 진실은 여학생을 쏜 범인은 경호원으로 문세광에게 쏘려던 총이 여학생에게 잘못 맞은 것. 육영수 여사가 맞은 총알의 행방과 진범의 정체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아 미궁에 빠져 있다. 이후 2005년 동아일보, SBS 다큐멘터리 등에서 암살의 진실을 파헤치는 보도가 이어졌다.

올해 육영수여사 서거 49주기를 추모하는 현수막이 시내 거리에 등장했다. 49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사건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다. 현재도 대통령보다 부인에 대한 움직임이 더 크게 보도되는 시대다. 고 박정희 대통령보다도 더 인기가 높았던 육영수 여사는 현재까지도 국민들에게 회자되며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인물이다. 김남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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